예술의 거리, 지친 현대인을 품다
예술의 거리, 지친 현대인을 품다
  • 이승희 기자
  • 승인 2019.12.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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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서울복합화력발전소 가는 길

흔히 발전소를 방문한다고 하면 자연스럽게 지방을 떠올리게 된다. 바람, 물, 태양 등 천연자원을 이용하는 재생에너지일수록 탁 트인 시야와 자연경관이 좋은 시골과 연관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서울화력발전소는 우리나라의 수도 한복판에 있다는 점에서 특별하게 다가왔다. 87년 동안 수도권 전력 생산의 한 축을 담당했던 의미있는 곳이며, 현재는 문화적 콘텐츠와 역사성을 기반으로 한 에너지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한 공간이기도 하다. 도보로 방문할 수 있는 인근에는 상수동 카페거리, 홍대, 망리단길 등 이른바 ‘핫한 감성’을 총 집약해놓아 일상 속 여유로움을 느끼기에 안성맞춤이었다.

6호선 상수역에서 내려 약 2분정도 걷다보면 ‘제비다방’을 발견할 수 있다. 제비다방은 1930년대 소설가이자 건축가였던 이상이 운영하던 ‘다방 제비’의 명맥을 이어가는 곳이다. 낮에는 카페로 운영되지만 밤에는 지하에서 라이브공연이 연주되는 분위기 좋은 술집으로 변신한다. 담벼락에는 매일 공연을 하는 뮤지션들의 정보가 빼곡이 적혀있으며 밤이 되면 간판이 움직여 ‘취한 제비’로 바뀐다.

빨갛게 페인트칠 된 철문을 조심스레 열고 들어가자 아늑한 공간이 펼쳐졌다. 여러 공연의 정보가 담긴 포스터와 팸플릿들이 벽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었다. 프랜차이즈 카페에 익숙해진 이들에게는 다소 산만해보일 수도 있겠으나 열정 자체만으로도 훌륭한 인테리어가 될 수 있음이 여실없이 느껴졌다.

지하로 내려가면 밤에만 운영되는 라이브공연장이 나온다. 공연을 볼 수 있도록 1층에 비해 의자들이 빼곡하다. 1층에 있는 손님들도 음악을 들을 수 있도록 지하의 천장을 없앤 것이 특징이다.

카페에서 따뜻한 유자차 한잔을 마시고 몸을 녹인 뒤 다시 길을 나섰다. 도보로 약 20분 거리에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이 있다.

양화진 외국인선교사 묘원은 1890년 미국 공사 허드가 조선 조정에 외국인묘지 제공을 요청했고, 그해 7월 양화진에 개설을 허가받으면서 생겨나게 된 곳이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우리 민족의 복음화와 근대화를 위해 진력한 선교사와 그 가족의 묘소가 마련되어 있다. 막연하게 공동묘지의 느낌이 날 거라고 생각했지만 전혀 아니었다. 각기 다른 크기와 모양의 비석들은 을씨년스럽다기보다는 경건한 느낌을 자아냈다. 관광지가 아니니 정숙을 요한다는 팻말과는 별개로 절로 숙연한 마음이 들었다. 각 비석마다 적혀있는 선교사의 이름과 행적이 자세해서 더 그랬을 것이다. 개방시간은 월요일부터 토요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이나 시간이 다소 늦어도 제재하는 사람은 없었다.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서 약 5분정도 거리에는 절두산순교성지가 위치해있다. 절두산순교성지는 조선시대부터 양화나루 잠두봉이라 불리며 한강변의 명승지로 불렸다. 1866년 병인박해 당시 수많은 천주교인들의 머리가 잘려 숨졌다고 하여 현재 절두산이라는 지명을 가지게 됐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난 후 순교자들의 넋이 서려있는 이 지역을 성지로 조성했고 병인박해 100주년이 되던 1967년 성당과 박물관이 준공됐다. 현재는 국가 사적 제399호로 지정됐으며 교황청 승인 국제 순례지인 ‘천주교 서울 순례길’ 코스 중 한 곳이다.

성지로 들어서면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동상, 팥마를 든 예수상, 성녀 마더 데레사 동상 등이 보이고 앞마당으로 들어서면 한국인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 신부의 동상이 거대하게 자리잡고 있다.

절두산순교성지에서 합정역 쪽으로 나오는 길에 위치한 동무밥상은 이북식요리를 파는 곳이다. 평소 평양냉면을 좋아하는데다 배가 출출하던 터라 망설임없이 들어갔다. 북한 옥류관 출신 윤종철 쉐프가 운영하는 곳으로 유명 맛집 프로그램에도 나왔던 곳이란다.

기대를 가득 안고 평양냉면과 만두를 시켰다. 냉면의 첫 맛은 동치미 국물 맛이 강하게 느껴져 만족스러웠으며, 통들깨가 들어있어 씹는 맛이 일품이었다. 다만 먹을수록 과하게 심심해지는 맛이라 아쉬웠다. 냉면 어디에도 얼음이 들어있지 않은데 시간이 지날수록 맛이 옅어진다는 점이 의아했다.

만두는 육즙이 몹시 풍부했으며 이북음식에 거부감이 강한 사람들이라도 좋아할 맛이었다. 함께 나온 간장 역시 짜지 않아 만두를 듬뿍 찍어 먹어도 부담이 없었다. 특히 밑반찬으로 나온 백김치가 일품이었는데 심심한 평양냉면과의 조화가 무척 좋았다. 함께 곁들여 나온 김치는 특이하게도 무와 양배추로 만들어졌는데, 평소 양배추를 좋아하지 않았음에도 시원한 동치미 느낌이 강해 좋았다.

동무밥상에서 도보로 15분거리인 서교예술실험센터는 서 울시 마포구 서교동에 있는 예술 창작 지원 시설이다. 지하 1층부터 3층까지 총 4개 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일반 관람객이 방문하는 1층은 다방을 함께 운영하고 있다. 주기별로 1층 전시관에 전시되는 내용이 다른데, 필자가 방문했을 때는 회화 및 인쇄작업 관련 전시가 진행되고 있었다.

마지막 코스로 점찍어둔 당인리책발전소로 향했다. 서울화력발전소는 예전 ‘당인리발전소’라고 불렸는데, 여기서 따온 이름이 바로 당인리 책발전소다. 당인리 책발전소는 김소영 아나운서가 운영하는 곳으로 유명해진 곳이다. 평일 저녁임에도 사람이 끊이질 않았고 군데군데 김 아나운서 부부의 자필로 적혀진 책 추천 문구가 눈에 띄었다. 1층은 카페를 겸하고 있었고 2층과 바깥 정원에서는 쉬었다 갈 수 있도록 의자가 마련되어 있었다. 대형 서점이 사람을 주눅들게 만드는 느낌이라면 당인리 책발전소는 되려 힐링의 시간을 선사하는 느낌이었다. 서울 도심에서 느낄 수 있는 평온함이 지친 일상에 짧은 위로가 됐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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