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시 수렁에 빠져버린 사용후핵연료 문제
또다시 수렁에 빠져버린 사용후핵연료 문제
  • 이헌석
  • 승인 2020.08.07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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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석 정의당 생태에너지본부장

30여 년간 반복된 핵폐기장 논란

탈핵 운동진영에서는 ‘한국탈핵운동의 역사는 핵폐기장 반대 운동의 역사’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핵폐기장을 둘러싼 우리 사회 갈등은 골이 깊다. 1989년 경북 영일과 울진, 영덕 등 동해안 3개 지역에 핵폐기장 건설을 추진했던 사실이 알려지면서 해당 지역주민들의 반대 운동이 시작된 이후 1990년 충남 안면도, 1994년 인천 굴업도, 2003년 전북 부안 위도 등 굵직굵직한 핵폐기장 반대 운동만 9차례 있었다. 그 중에는 지역주민들의 반대로 백지화된 지역도 있지만, 굴업도처럼 정부의 계획대로 추진되었으나 지질 문제로 정부 스스로 계획을 철회한 경우도 있었다.

밀실에서 선정된 핵폐기장 부지, 정부의 일방적인 계획 추진과 지역주민들의 반대, 대규모 시위로 인한 사회적 갈등, 그리고 정부의 백지화 선언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은 지난 30여 년간 반복됐다. 그때마다 지역주민들의 정부에 대한 불신은 높아졌고, 특히 핵발전소 인근 지역주민들의 불신은 매우 심하다. 지역 갈등이 있을 때마다 반복되는 지역주민들끼리의 ‘민-민 갈등’으로 지역주민들의 피로감 또한 매우 높은 상태이다.

복잡한 실타래처럼 마구 엉켜있는 사용후핵연료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은 종종 ‘과거의 일은 잊어버리고 새롭게 출발하자’라고 이야기하지만, 이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간 정부가 여러 차례 약속한 ‘사실’이 있었고, 지역주민들은 ‘속는 줄 알면서도 일단 믿어보자’라며 정부의 약속을 신뢰했으나 정권이 바뀌고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그 약속은 계속 어긋나 왔던 것이 사용후핵연료 문제를 둘러싼 갈등이다. 

2005년 핵폐기장 주민투표 당시 노무현 정부의 약속

그 중 대표적인 것이 2005년 중저준위핵폐기장 부지선정을 하면서 했던 ‘사용후핵연료 관련 시설’을 짓지 않겠다는 약속이다. 2005년 노무현 정부는 경주, 군산, 포항, 영덕 등 네 군데 지역을 서로 경쟁시키며 중저준위핵폐기장 주민투표를 강행했다. 2003년 부안 핵폐기장 건설을 둘러싸고 지역 갈등이 심해지자, 정부는 지자체 신청을 받아 해당 지역에 주민투표를 진행하고, 그 중 찬성률이 가장 높은 지역을 중저준위핵폐기장 부지로 선정하겠다고 발표했다. 정부는 해당 지역에는 3,000억 원의 유치 지원금과 8조 원 상당의 지역지원, 한수원 본사 이전과 양성자 가속기 건설이 지원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해당 지역에는 더 이상 사용후핵 연료 관련 시설을 짓지 않을 것을 법으로 약속했다. 실제 이 약속에 따라 중저준위 방폐물 처분시설 유치지역지원에 관한 특별법이 만들어졌고, 그 법 18조에는 ‘사용후핵연료 관련 시설은 유치지역에 건설하여서는 아니된다’는 조항이 추가되었다.

2005년 진행된 방폐장 주민투표는 자유당 정권 이래 가장 최악의 투표였다. 허술한 주민투표법을 이용해 지자체장은 통장, 반장, 이장은 물론이고 시청 공무원들까지 나와 유인물을 돌리고 마을 설명회를 하는 ‘관권 선거’를 진행했고, 주민투표 찬성 독려를 위해 수건 같은 선물을 돌리는가 하면 식당에서 밥을 사며 선거운동을 하는 ‘금권선거’도 수차례 적발됐다. 부재자 투표 신청과정에서는 대리 서명을 통해 죽은 사람까지 부재자 신고서에 이름을 올리는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경주와 군산에서 영호남 지역감정을 부추기는 욕설이 현수막에 담기는 등 눈 뜨고 보기 힘들 광경이 펼쳐졌다. 경주지역 중저준위핵폐기장 찬성률 89.5%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이 혼란 속에서 중저준위핵폐기장 유치를 주장했던 이들은 ‘어차피 핵발전소가 있는 지역, 더 위험한 사용후핵연료 빼내고 덜 위험한 중저준위핵폐기장 유치하자’는 구호를 외쳤다. 중저준위핵폐기장 유치운동을 했던 이들은 중저준위핵폐기장을 유치하면 사용후핵연료는 가져나갈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당시에도 탈핵 진영은 현실은 다르게 진행될 것이라고 핵폐기장 유치 진영을 비판했다. 그리고 그 일은 실제 벌어졌다.

해외에서는 중간저장시설인 맥스터 운영

현재 논란이 되는 맥스터(MACSTOR, Moudular Air Cooled STORage)는 캐나다에서 개발한 사용후핵연료저장시설의 이름이다. 핵발전소에서 사용을 마친 핵연료는 열을 식히기 위해 수년간 붕산수가 들어간 수조에서 보관해야 한다. 경주 월성의 핵발전소는 천연 우라늄을 사용한 중 수로형 원자로이기 때문에 사용후핵연료의 양이 다른 핵발전소에 비해 월등히 많다. 따라서 모든 사용후핵연료를 수조에 보관할 수 없어 별도의 건식저장시설을 운영하고 있다. 한수원은 이를 ‘임시저장시설’이라고 부른다.

문제는 우리나라 원자력법 어디에도 ‘임시저장’이란 개념이 없다는 것이다. IAEA를 비롯해 다른 나라는 영구적으로 인간 생활권에서 사용후핵연료를 격리하는 ‘영구처분(Final Disposal)’과 영구처분이 이뤄지기 전까지 사용후핵연료를 보관하는 ‘중간저장(Interim Storage)’이 있을 뿐이다. 우리나라도 원자력법에 사용후핵연료 중간저장에 관한 규정이 있기는 하지만, 아직 중간저장시설이 설치된 적이 없기 때문에 가장 기본적인 규정만 마련되어 있을 뿐이다.

캐나다의 맥스터는 중간저장을 위해 설계된 시설이다. 나라마다 다르지만, 미국, 일본, 독일, 캐나다 등 많은 나라가 사용후핵연료 중간저장시설을 건설해 50~60년 정도 운영하고 있다. 50~60년은 10만 년 이상 보관해야 하는 사용후핵연료 특성을 고려할 때는 매우 짧은 기간이지만, 인간의 수명을 고려할 때는 매우 긴 시간이다. 또 영구 처분기술이 매우 어렵고 영구처분장을 구하기 힘들어서 중간저장이 계속 반복될 수 있어 중간저장 시설이 사실상 핵폐기장처럼 변할 수 있다는 우려가 항상 끊이지 않고 있다. 실제로 캐나다 정부는 사용후핵연료 영구처분 기술과 부지를 확보할 때까지 최대 300년 동안 중간저장을 이어갈 계획을 확정 짓기도 했다. 그만큼 불확실성은 크고 인간의 기술은 아직 부족한 것이 많기 때문이다.

말장난 같은 ‘관련 시설’과 ‘관계 시설’

다시 정부의 약속으로 돌아가 보자. 현행법으로 중저준위핵폐기장이 있는 지역에는 '사용후핵연료 관련 시설’을 짓지 못하게 되어 있다. 맥스터는 사용후핵연료를 보관하는 시설이다. 애초 정부의 약속도 중저준위핵폐기장을 먼저 짓고, 이후 고준위핵폐기장을 건설하는 순서를 진행하면서 기존 사용후핵연료(고준위핵폐기물)는 다른 지역으로 옮겨가겠다는 취지였다.

그러나 정부는 맥스터는 ‘사용후핵연료 관련 시설’이 아니라, ‘원자력발전소 관계시설’이라고 주장한다. 원자력안전법에는 핵연료를 보관하는 시설을 ‘원자력발전소 관계시설’로 별도로 규정하고 있다. 이에 따라 정부는 맥스터를 지어도 된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소위 ‘관련 시설, 관계시설 논란’이다. 맥스터는 수십 년간 사용후핵연료를 보관하는 시설임에도 이를 ‘관련 시설’이라고 인정하지 않는 것은 사용후핵연료 보관 시설에 대한 법적 기준이 여전히 모호하기 때문이다. 이를 바로 잡을 생각을 하지 않은 채, 주민투표까지 진행한 사안에 대해 국민들과의 약속을 저버리는 정부의 태도는 이해하기 어렵다.

박근혜 정부의 ‘사용후핵연료 공론화’

맥스터를 둘러싼 논란은 박근혜 정부에서도 계속 이어졌다. 2013년 박근혜 정부는 ‘사용후핵연료 공론화위원회’를 만들어 고준위 방폐물 관리계획을 수립하려고 했다. 사회적 갈등이 심한 사용후핵연료 문제 해결을 위해 국가 차원의 ‘공론화위원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시민사회의 요구는 부안 핵폐기장 투쟁 이후 계속 이어졌고, 이명박 정부에서 공론화위원회 구성이 잠시 논의되었으나 실행되지 못하고 박근혜 정부까지 이어진 것이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의 사용후핵연료 공론화위원회는 출범부터 파행이었다. 출범식 날 시민사회단체 추천 위원 2명이 사퇴하고, 공론화 기간 내내 내부 갈등이 이어져 총 15명 위원 중 9명만 최종 보고서에 서명하는 일이 벌어졌다. 당시 사용후핵연료 공론화위원회는 향후 12년간 중간저장·영구처분 부지를 찾고, 24년 동안 영구처분장을 건설하여 36년 뒤 영구처분장을 운영하는 로드맵을 제출했고, 박근혜 정부는이 계획을 확정 지었다. 하지만 이 계획에는 당장 핵발전소내에 포화되는 사용후핵연료 저장고 문제에 대해 일단 발전소 부지내 저장을 기정사실로 했다. 별도의 중간저장소를 찾기 전까지는 기존 핵발전소 부지내에 중간저장소를 건설해 저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계획에 모든 핵발전소 인근 지역주민들은 반발했다. 실제 정부의 계획과 달리 최종처분장 부지가 확정되지 않을 경우, 기존 핵발전소 부지가 핵폐기장으로 바뀌는 것을 막을 아무런 장치가 없었다. 정부에 대한 불신이 수십 년간 쌓인 상태에서 최소한의 안전장치조차 없는 핵발전소 부지내 저장은 지역주민들의 눈에는 자신의 지역이 ‘핵발전소 폐쇄 이후 핵폐기장’으로 바뀌는 것을 의미했다.

특히 경주의 반발은 컸다. 의견서에서 경주는 사용후핵연료 중간저장시설이나 영구처분장의 대상지역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미 법률로 ‘사용후핵연료 관련 시설’을 짓지 않기로 했는데, 추가건설이 웬 말이냐는 것이다. 또한 이전 정부가 계획했던 것처럼 2016년까지 경주에 있는 사용후핵연료를 모두 반출하라는 요구도 함께 의견서에 담았다.

안타깝게도 이런 요구는 박근혜 정부의 고준위 방폐물 관리기본계획에 담기지 못했다. 오히려 반대의 내용 – 최종처분장을 짓기 전까지 경주에 저장시설을 증설하는 내용이 담기자 경주 지역주민들의 반발은 컸다. 이렇게 지역주민들과 정부의 갈등은 계속 이어졌다.

문재인 정부의 ‘사용후핵연료 재검토’

문재인 대통령이 후보 시절 ‘사용후핵연료 관리정책 전면 재검토’를 공약으로 채택한 것은 핵발전소 인근 지역주민들과 시민사회단체의 요구를 수용한 결과이다. 이후 문재인 정부는 100대 국정과제에 ‘공론화를 통해 사용후핵연료정책을 재검토’를 포함시키면서 본격적인 재검토과정에 들어갔다.

‘재검토’란 말 그대로 기존 정책을 다시 검토하고 계획을 새로 수립하는 것을 의미한다.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진 사용후핵연료 문제를 원점으로 돌려 제대로 된 관리정책을 수립하지 않는다면, 수십 년간 쌓인 불신과 꼬여버린 정책의 실타래를 풀 수 없기 때문이다.

2018년 정부가 고준위방폐물 관리계획 재검토 준비단을 만든 것 역시 같은 맥락이었다. 본격적인 재공론화에 앞서 공론화 의제와 순서, 공론화 방법론 등을 점검해야 한다는 주장을 한 것도 지역주민들과 시민사회단체였다.

신고리 5, 6호기 건설 재개 여부를 묻는 공론화를 거치면서 제대로 된 공론화를 하기 위해서는 사전에 충분한 협의가 필요하다는 교훈을 얻었기 때문이다. 사용후핵연료 문제는 신고리 5, 6
호기 건설 여부보다 훨씬 복잡한 사안이며, 이해당사자가 다양했다. 흔히 많은 이들은 핵발전소 문제가 있을 때마다 찬핵과 반핵(탈핵) 양 진영이 부딪힌다고 생각하지만, 현실은 매우 다르다. 특히 사용후핵연료 문제는 지역 내에서도 다양한 입장이 상충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한때 중저준위핵폐기장을 유치하자고 주장했던 이들이 지금은 맥스터 건설에 반대하는 경우가 많다. 애초 정부의 약속과 실행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재검토 준비단 역시 마찬가지였다. 탈핵진영 시민사회단체와 원자력계, 지역주민들은 서로 입장이 미묘하게 달랐다. 지역주민들 역시 5개 지역의 상황에 따라 조금씩 미묘하게 다른 입장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론화의 의제, 공론화의 순서에 대해 재검토 준비단은 합의했다. 20여 개에 이르는 공론화 의제는 이후 고준위방폐물 관리정책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쟁점 사안이었다. 복잡한 실타래를 풀수 있는 중간 기착지 같은 것이었다. 공론화 순서 역시 매우 첨예한 주제였지만 사용후핵연료 관리정책의 큰 그림을 그리고 각 핵발전소 지역별로 포화되는 저장고 증설 문제를다루는 것으로 합의를 이뤘다. 발전소별 사용후핵연료 저장고 증설 문제가 워낙 휘발성이 큰 주제이기 때문에 이를 먼저 다루거나 전체 정책과 동시에 논의될 경우, 임시저장고증설 여부만 논의하다 끝나버리기 때문이다.

특히 모든 핵발전소 지역주민들이 사용후핵연료 반출을 원하는 상황에서 관리정책에 대한 큰 그림이 없으면 논의가 쉽지 않은 점도 크게 작용했다.

행정편의주의 끝판왕 ‘공론화’

하지만 재검토위원회의 위원 구성과 논의 범위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았다. 특히 재검토위원회에 지역주민이나 시민사회단체, 원자력계와 같은 이해당사자가 참여하는 것에 대해 정부의 반발이 컸다. 재검토 준비단 초기에는 산업부는 논의에 개입하지 않겠다며 한발 물러선 상태였지만, 준비단 막바지로 가면서부터 산업부의 개입은 점점 커졌다. 재검토 준비단에 이해당사자가 포함되면 위원회가 파행에 이를 것이라고 정부는 주장했다.

순수 중립적 인사들로 구성된 ‘재검토위원회’

찬핵·탈핵진영에 한 번도 개입한 적이 없는 인사들, 관련 글이나 발언을 한 적도 없는 무색무취의 인사들로 구성된 재검토위원회. 얼핏 보기에 좋아 보이는 이 표현은 바꿔말하면, 사용후핵연료 문제에 대해 잘 모르는 이들을 의미하기도 했다.

또한 그들과 사용후핵연료 업무를 잘 알고 있는 산업부 관료들의 만남은 결국 산업부 관료들의 뜻에 따라 재검토위원회가 운영될 수밖에 없는 본질적인 한계를 갖고 있기도 했다. 매일 사무실에 출근해서 십수 년째 해당 업무를 하는 이들과 자신의 분야에서는 전문가이지만 사용후핵연료 분야는 낯선 이들이 평소 자신의 일을 하다가 1주일에 한 번씩 회의에 참석하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논의의 주도권은 관료들에게 몰릴 수밖에 없다.

전세계에서 유래를 찾을 수 없는 한국적 공론화 방식 역시 마찬가지이다. ‘공론조사(Deliberative Polling)’는 미국 스탠퍼드 대학의 피시킨 교수가 언급한 일종의 여론조사 방식이다. 일반적인 여론조사에서 다루기 힘든 ‘숙의(熟議)’가 필요한 사안에 대해 균형 잡힌 정보를 제공하고, 소그룹 토론과 패널과의 질의응답을 통해 내용을 숙지한 이후 2차 조사를 하여 최초 결과와 최종 결과를 비교하는 것이다. 흔히 모든 여론조사가 그렇듯 공론조사 역시 정책의 참고자료로 쓰일 뿐이지 최종 결정은 정책을 결정하는 정부나 지자체가 하게 된다.

하지만 한국의 공론조사는 이 방식을 변형한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숙의를 위한 정보 전달 방식이다. 미국의 인류학자 에드워드 홀은 의사소통과 관련해서 ‘고맥락/저맥락(High Context/Low Context) 문화’가 존재한다고 제시했다.

한국, 중국, 일본, 아랍 등의 나라에서는 별도 명시된 바가 없더라도 자명하다고 암묵적으로 인정되는 부분이 많다는 것이다. 또한 텍스트에 포함되지 않은 비언어적이고 상황 중심적인 메시지가 많다는 것이다. 이를 고맥락 문화라고 한다. 정보를 전달하면서 감성을 다루는 표현을 많이 사용하며, 발표자의 학력, 경험 같은 비언어적인 것들이 함께 어우러지면서 정보 전달을 하는 특성을 갖고 있다.

한국어는 다른 언어에 비해 이런 경향이 심하다. 피시킨의 공론조사에서는 발표자가 직접 발표하거나 개인의 지위나 권력을 사용하는 것들을 엄격히 제한하고 있다. 비언어적인 요소들의 문제점을 최소화하지 않으면 정보 전달 역시 왜곡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실제 신고리 5, 6호기 공론화에서도 이런 요소들이 문제를 많이 일으켰다.

대학교수, 박사, 전문가라고 불리는 이들의 훈련된 말솜씨와 서툴고 정제되지 않은 비전공자, 지역주민들의 말들은 신고리 5, 6호기 공론화 과정에서 계속 비교되었다. 부족한 논리, 세련되지 못한 설명 방법까지 뒤섞이면서 정보는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다. 반면 피시킨의 공론조사는 모든 자료를 자료집 형태로 제공하도록 하고 있다. 질의응답이 필요한 부분에 대해서만 매우 제한적으로 전문가 패널이 정보를 제공할 뿐이다.

이런 문제점은 신고리 5, 6호기 공론화 이후에 계속 이어졌지만 아직까지도 해결되지 않고 있다. 현재 정부가 추진하는 공론화의 더 큰 문제점은 단순한 여론조사 성격에 불과한 공론조사를 정책 결정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수주일~수개월 동안의 공론화 과정만 거치면 찬 · 반이 정리된 확실한 보고서가 나온다는 점은 행정관료에게는 큰 매력이다. 이 결과가 절대적인 국민 여론을 의미하지 않지만, 지금까지 공론화 결과 보고서는 그런 취급을 받았다.

몇 차례 전화 여론조사로 정책을 결정하지 않는 이유는 단순한 여론 조사 결과만 갖고 정책을 결정하기에는 고려해야할 사안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정 정도의 비용과 시간만 투자하면 큰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찬 · 반을 나누는 역할을 ‘한국판 공론조사’는 지금까지 진행되어 왔다.

핵발전소 지역주민들이 수십 년 동안 핵폐기물과 핵발전소로 고통받은 현실을 몇 번의 정보 제공을 통해 도시민들이 이해할 수 있을까? 또 숫적으로 열세일 수 밖에 없는 핵발전소 지역주민들의 목소리를 누가 시민참여단에서 대변할 것인가 같은 문제는 지속적으로 제기되었지만 뚜렷한 답이 없다.

전국적 이슈에 대해 수백명에 불과한 시민참여단이 모여 논의한 것만 갖고 ‘사회적 합의’ 혹은 ‘국민들의 합의’를 이뤘다고 하는 것은 그 자체가 코미디에 가까운 일이다.

맥스터 추가 건설, 누구를 위한 것일까?

수많은 흠결 사항과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맥스터 건설을 추진하겠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최근 국회에 출석한 산업부 장관은 공론화 과정이 ‘원칙과 절차를 지킨 것’이라고 밝혔다. 앞으로 큰 문제가 없다면, 정부의 뜻대로 그대로 건설될 것이다. 하지만 이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수명이 끝나 해체 작업에 들어가는 고리1호기의 사용후핵연료를 보관할 저장시설도 건설해야 한다. 고리뿐만 아니라, 영광, 울진의 사용후핵연료 저장고도 조만간 포화된다.

이들 지역에는 사용후핵연료 저장고를 추가로 증설해야 할까? 그때도 이번처럼 정부가 일방적으로 추진하는 ‘공론화 프로그램’을 통해 ‘절차상 하자가 없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십분 양보해서 이들 지역에 사용후핵연료 저장시설을 짓는다고 생각해보자.

그러면 우리나라의 사용후핵연료 문제는 모두 해결될까? 그렇지 않다. 지금의 기술로는 단지 50여 년 남짓한 세월 보관할 장소를 만들 수 있을 뿐이다. 핵발전소는 모두 수명이 끝나 해체되더라도 핵폐기물인 사용후핵연료는 그 장소에 남아 우리 손자의 손자들에게 떠넘겨질 것이다.

우리 세대에 만든 핵폐기물 문제는 우리 세대가 기본적인 해결 방안을 마련하는 것이 상식이다. 우리가 당장 기술이 부족하다면, 기술개발을 하기 위한 자금과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 안전하게 처분할 수 있는 땅을 찾고 그것을 검증하는 것을 우리가 해야 한다. 무책임하게 핵폐기물을 마구 만드는 일을 멈추는 일과 함께 우리 세대가 할 책임은 너무나 크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이런 논의는 아직 시작도 하지 못했다. 맥스터가 건설되지 않으면, 나라가 당장 망할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우리가 사는 2020년은 발전소가 너무 많아 발전사업자들이 적자에 빠져있는 세상이다.

아직 주변에는 사용후핵연료나 맥스터라는 말을 처음 들어보는 이들이 다수이다. 매일매일 전기를 사용하지만, 전기 플러그 끝에서 돌고 있는 핵발전소나 거기서 나오는 사용후핵연료의 존재는 학교에서도 잘 가르쳐주지 않는다.

하지만 핵발전소 인근 지역주민들은 매번 사용후핵연료 논란이 있을 때마다 생계를 뒤로하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러나 이들에게 돌아오는 우리 사회의 이야기는 언제나 ‘님비(NIMBY)’ 같은 것들이었다. 사용후핵연료문제를 바로 잡는 것은 그동안 이렇게 왜곡되어온 우리 사회의 모습을 바로 잡는 것이기도 하다. 2020년 한국 사회에서는 누군가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모두 함께 책임을 나누는 것이 맥스터 건설보다 훨씬 중요하다.

이헌석 keaj@keaj.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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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yman94 2020-08-12 18:14:32
결국 박근혜정부에 잘못을 바로잡지 못하고 있는것이군요. 동의합니다.

박상덕 2020-08-12 11:56:45
결국 문재인 정부가 제대로 못하고 있다는 것이군요. 동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