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좋아하세요?] “웃음 지어주세요. 아무 일 없듯”
[뮤지컬, 좋아하세요?] “웃음 지어주세요. 아무 일 없듯”
  • 이승희 기자
  • 승인 2020.11.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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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돋보기 - 임준혁 편

뮤지컬 ‘베르테르’는 다른 사람과 결혼을 약속한 여자에게 첫눈에 반해버린 베르테르의 비극적인 사랑을 다룬 이야기다. 베르테르는 우연히 한 펍(Pub)에서 정원사로 일하는 카인즈를 만난다. 카인즈는 미망인이 되어버린 귀족 여주인을 짝사랑하는 청년으로 베르테르는 그의 사랑을 응원하며 그가 계속 여주인에 대한 마음을 키워나갈 수 있도록 돕는다.

카인즈는 베르테르와 가장 닮아있는 동시에 관객들이 두 손 모아 행복해지길 기도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정원사 주제에 미망인이 되어버린 여주인을 사랑한 그는 약혼자가 있는 여성에게 빠져버린 베르테르와 겹치는 지점에 놓여있다. 귀족과 정원사의 사랑이라니. 베르테르의 비극적인 앞날을 알고 있는 관객들은 자연스레 카인즈의 사랑을 응원하게 된다. 꿩 대신 닭. 그래. 너라도 행복해지렴. 관객이 초반 카인즈에게 가지는 마음일 것이다.

미망인과 마음이 통한 후 펍에 찾아온 카인즈는 크게 소리 친다. “저 카인즈가 해냈습니다. 여러분!” 흡사 음 이탈에 가까울 정도의 목소리는 카인즈가 얼마나 흥분했는지, 그의 사랑이 보답받은 것에 얼마나 기뻐하고 있는지 고스란히 느껴진다. 모든 것이 베르테르의 응원 덕분이라며 여주인과 결혼해 아이를 낳게 된다면 이름을 베르테르라고 짓겠다는 것만 봐도 순수함이 느껴진다. 김칫국 마시지 말라며 한 소리 하고 싶지만 웃음부터 나온다. 카인즈가 그만큼 어리고 여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두의 염원과 달리 카인즈의 사랑은 비극으로 끝난다. 카인즈가 여주인을 위해 살인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여주인이 오빠에게 맞는 것을 지켜본 카인즈는 들고 있던 가위로 남자를 살해하고 도망친다. 살인은 정당화할 수 없지만 마을 사람 모두가 나서 카인즈를 옹호한다. “그 누구도 당신을 아프게 하면 안 돼요. 제가 지켜줄 겁니다” 라고 말한 카인즈를, 가정학대로부터 사랑하는 여자를 지키려 한 청년을 누가 섣불리 비난할 수 있겠는가.

카인즈의 넘버인 ‘괜찮아요’가 시작되면서 이야기는 절정에 치닫는다. 피 묻은 옷을 입고 결박된 채 주저앉은 카인즈는 말한다. “웃음 지어주세요. 아무 일 없듯. 저는 괜찮아요. 후회하지 않아요. 마음을 불태웠으니. 한 줌 재로 남는데도 내 마음 평화롭죠.” 카인즈는 결국 처형되기 위해 끌려가고 그를 구하지 못한 베르테르는 자책 속에 무너져 내린다. 카인즈가 자신과 비슷한 처지였던 만큼 자신과는 달리 행복해지길 바랐을 베르테르다. 자살로 생을 마감한 베르테르와 사랑하는 여주인을 지키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카인즈. 둘 중 누가 더 행복하게 눈을 감았을지는 관객의 몫으로 남는다.

사실 카인즈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사람을 죽인 주제에 후회하지 않는다니. 가사만 놓고 보면 비난 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웃음 지어 달라는 말로 운을 뗄 떼의 카인즈를 보면 손가락질하기 힘들다. 그것은 온전히 카인즈를 연기한 임준혁 배우의 힘이다. 떨리는 목소리에서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느껴지지만 정확하게 짚어나가는 음정은 후회하지 않으려는 노력이 여실히 느껴진다. 살인에 대한 후회가 여주인에 대한 마음을 부정하는 것으로 이어질까 두려운, 사랑했으니 그 어떤 것도 후회하지 않겠다는 결의마저 느껴진다. 고양이 같은 눈매에 미망인 여주인보다 열댓 살은 적어 보이는 말랑한 청년을 연기한 임준혁 배우는 삶의 경계에서 사랑을 노래한다. 한 점 후회 없는 사랑을 했으니 괜찮다고. 이내 떨림조차 사라진 단단한 목소리 앞에서 관객은 숙연해진다. 각박한 세상에서 그동안 잊고 살았던 ‘순수한 사랑’의 가치가 불쑥 떠오르는 순간이다.

임준혁 배우가 사랑에 좌절한 배역을 맡은 것은 카인즈가 처음이 아니다. 뮤지컬 ‘베어 더 뮤지컬’에서도 그의 사랑은 비극으로 끝이 났다.

‘베어 더 뮤지컬’은 성 세실리아 기숙학교에서 사랑에 빠져 버린 동성애자 커플 피터와 제이슨의 이야기를 다룬 뮤지컬이다. 자신들의 사랑을 세상에 알리고픈 피터와 학교의 대표 킹카이지만 가진 것을 잃을까 두려운 제이슨이 대립하면서 극이 진행된다. 이후 제이슨을 좋아하게 된 아이비가 등장하면서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극 초반 표현되는 피터와 제이슨은 이성커플과 다를 바 없이 행동한다. 잠깐 떨어져 있다 만났음에도 며칠은 헤어져 있었던 것처럼 애가 닳은 입맞춤, 몸을 쓰다듬는 과감한 터치, 굳이 한 침대에서 티격태격하는 모습까지. 여느 평범한 연인들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다.

그러나 이야기는 모두가 예상하듯 순탄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피터 위주로 진행되는 극에서 “여긴 다 환상일 뿐. 현실이 기다려. 잘 생각해. 그만하자”라고 말하는 제이슨에게 관객은 야속함마저 느낀다. 사랑한다더니, 너뿐이라더니, 왜 제이슨은 숨기려고만 할까.

그러나 제이슨이 처한 배경을 생각하면 어느 정도 납득이 간다. 못난 얼굴 탓에 늘 자격지심에 빠져있는 여동생, 아들이 가문을 일으켜 세울 것이라며 크게 기대하는 아버지, 자신을 남자답고 멋있는 사람이라고 칭송하는 친구들, 끊임없이 관심을 표시하며 유혹하는 아이비까지. 그 속에서 능숙하게 중심을 잡기엔 제이슨 역시 미성년에 불과하다. 아직 다 자라지 못한, 무엇이 정답인지 모르고 흔들리는 존재.

아이비의 유혹에 넘어가는 1막 마지막 장면은 유독 그렇다. ‘나는 여자와 잘 수 있는 정상적인 남자야’라고 되뇌고 있을 것만 같은 모습에선 어떤 결의마저 느껴진다. 여자와 관계하며 “이제서야 알 것 같아. 이게 옳다는 것을”이라고 중얼거리는 남자라니. 제이슨의 행위 어디에서도 아이비를 향한 애정은 보이지 않는다. 제이슨은 홀로 답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제이슨의 세상에서 어떤 어른도 그에게 정답을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관객이 제이슨을 보며 분노보다는 안타까움을 느낄 수밖에 없는 이유다.

결말마저 제이슨답다. 몸만 자라버린 제이슨은 용기를 내 마지막으로 피터를 붙잡지만 결국 거절당한다. 다 자라지 못한 소년에게 연인의 거부란 세상과의 단절보다 더한 무게로 다가왔을 것이다. 감당할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제이슨에게 주어진 선택지란 ‘도피’ 뿐이었을지 모른다.

임준혁 배우는 모두에게 인기 만점인 제이슨과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불안해하며 흔들리는 제이슨의 이면 모두를 훌륭하게 보여준다. 극이 끝나고 커튼콜에 등장한 임준혁 배우는 참지 못하고 눈물을 보였다. 피터와 깍지 낀 그의 손은 파르르 떨렸다. 그것만으로도 관객석은 훌쩍이는 이들로 가득했다. 보답받지 못한 사랑, 끝나버린 삶, 다시는 볼 수 없는 사랑하는 피터. 그 모든 감정들이 흘러넘쳐 서 있기 버거워 보이던 임준혁 배우는 이미 제이슨 그 자체였다. 앳된 얼굴과 힘있고 단단한 목소리가 조화로운 그의 차기작 ‘블랙메리포핀스’는 다음 달 31일까지 대학로 TOM(티오엠) 1관에서 만나볼 수 있다.

이승희 기자 aga4458@k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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