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좋아하세요?] “지워지는 순간을 견딜 수 없다면”
[뮤지컬, 좋아하세요?] “지워지는 순간을 견딜 수 없다면”
  • 이승희 기자
  • 승인 2020.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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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돋보기 - 김종구 편

뮤지컬 ‘비스티’는 영화 ‘비스티 보이즈’를 원작으로 각색했다. 호스트바 개츠비를 배경으로 진행되는 극으로 마담 이재현과 개츠비 소속 선수 4명이 등장한다.

이야기는 개츠비 선수들이 생활하는 룸을 배경으로 진행된다. 그곳에서 선수들은 손님을 대할 때와는 전혀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몸 팔고 웃음 파는 사람들의 생생한 민낯이 드러나는 공간이기도 하다. 배우들의 대사를 통해 누군가는 꿈을 이루기 위해, 누군가는 가족을 살리기 위해 개츠비에서 일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관객이 쉽게 감정을 이입할 수는 없다. 그들이 보여주는 모습에서 묘한 이질감, 정확히는 말과 행동이 따로 노는 모습들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쉽게 돈을 벌어서 낭비하는, 말하자면 한심하다고 불러도 괜찮을 사람들의 집합이니 당연하다. 이는 대중이 호스트바에 대해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이미지와도 상통한다. 그 속에서 개츠비의 에이스 주노는 다른 선수들을 포용하는 맏형을 연기하지만 돈을 낭비하고 쉽게 욕설을 내뱉는 모습을 통해 그도 별다를 것 없는 선수라는 점을 보여준다.

그렇게 선수들뿐이었던 개츠비에 재현이 등장하면서 무대는 전혀 다른 색채를 띠게 된다. 재현이 가진 묵직한 분위기, 빚 독촉을 하며 내뱉는 욕, 자연스레 내뿜는 담배 연기는 관객들이 순식간에 극에 집중하게 한다. 이재현을 위한 극 ‘비스티’가 시작되는 순간이다.

‘비스티’는 스토리 자체가 대단하지는 않다. 재현이 선수 개개인과 가진 갈등을 통해 이야기가 진행된다. 선수들은 재현에게 마이킹 한 돈 때문에 개츠비를 떠나지 못하고, 유일하게 빚이 없는 주노는 자신의 첫사랑이자 재현의 아내인 지원 때문에 떠나지 않는다. 모두가 저마다의 이유로 개츠비에 남아있고 재현은 그런 선수들을 옭아매면서 이야기는 절정으로 향한다.

그와 동시에 재현의 폭력성도 극에 치닫는다. 다만 극은 영리하게 재현이 가진 폭력성이 어디서 기인했는지 설명해준다. 재현이 부르는 ‘마담은 알아’를 통해 그의 삶에 동정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긴 것이다.

“살아남아. 악착같이. 자기 걸 빼앗겨선 안 돼. 내 거라고 생각되면 무조건 움켜쥐는 거야. 필요하면 뺏는 거야. 다른 건 신경 쓸 거 없어. 그게 지금껏 내가 살아온 방식이야.”

사랑이라는 감정을 제대로 배우지 못해 원하는 것은 빼앗아야 한다고 배워 온 남자. 생존을 위해, 외롭지 않기 위해, 돈이든 사람이든 닥치는 대로 움켜쥐려고 발버둥 쳐왔던 사람. 그러나 그의 삐뚤어진 애정은 선수들에겐 집착으로 다가갔다.

“마담은 알아. 나는 다 보여.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어. 아주 작은 생각까지도 말이야.” 재현은 작은 생각까지도 알고 있다고 확신하지만 사실은 희망 사항에 가깝다.

관객들은 알고 있다. 재현이 선수들을 옥죌수록 그가 고립될 수밖에 없었을 거란 사실을. 자업자득인 셈이다. 그러나 관객이 냉정하게 재현을 내치지 못하고 그를 아픈 손가락으로 여기게 된 것은 김종구 배우 때문이다.

뮤지컬 ‘비스티’ 커튼콜 장면
뮤지컬 ‘비스티’ 커튼콜 장면

김종구 배우가 연기하는 재현은 관객들에게 ‘빵마담’으로 불린다. 마담 역할을 하는 다른 배우와 달리 김종구 배우만 무대에서 식빵을 먹기 때문이다. 빵마담이라는 단어는 단순한 애칭을 넘어 김종구 배우가 연기하는 재현의 외로움에 설득력을 부여한다. 김종구 배우의 재현은 빵에 잼을 발라 대충 끼니를 때우면서도 선수들과 마주칠 때마다 밥은 챙겨 먹었는지 묻는다. 뿐만 아니라 본인이 감금한 주노가 끼니를 거르지 않길 바란다.

이게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 사랑인 걸까. 감금된 곳에서 탈출해 본인을 찾아온 주노가 “형은? 형은 밥 먹었어?”라고 물을 때 김종구 배우는 섣불리 대답하지 못한다. 이를 통해 관객은 이재현이라는 사람의 외로움이 얼마나 극에 달했는지 알게 된다. 실제로 극이 시작되고 선수들은 단 한 번도 재현에게 물은 적이 없다. 밥은 먹었냐고, 같이 밥 먹지 않겠냐고, 너 지금 괜찮은 거냐고. 사실은 전혀 괜찮지 않았을 재현에게 누구도 섣불리 다가가지 않았다. 그가 보여주는 폭력성에 질려 모두가 외면했던 인간 이재현이 떠오르는 순간이다.

선수들이 떠나고 난 뒤 홀로 개츠비에 남은 재현이 부르는 넘버 ‘지워지는 순간을 견딜 수 없다면’은 그의 고독을 최대치로 끌어올린다. “흘러버렸다 시간이. 돌아갈 수 없는 여기까지. 지워질 것들은 지워야 한다. 마지막까지 함께 할 수 없다면. 지워지는 순간을 견딜 수 없다면.”

노래를 마저 부르지 못하고 욕을 내뱉는 모습. 모두와의 추억이 진득하게 배어있는 그곳에서 홀로 어둠을 덮고 있는 모습. 담배에 불도 붙이지 못하고 온몸을 떨면서 오열하는 모습. 김종구 배우가 만들어낸 고독을 엿본 관객은 기꺼이 그가 만들어낸 비극 안으로 걸어 들어간다.

‘비스티’가 상당 부분 배우들의 애드립에 따라 진행된다는 점 역시 김종구 배우의 이재현을 한층 매력적으로 만든다. 몇몇 장면의 경우 기본 틀만 정해놓고 매 공연 변주를 거듭한다. 재현이 막내 선수의 칼에 찔리는 결말도 ‘칼에 찔린다’는 상황은 변함없지만 배우들의 대사나 몸짓은 매일 다른 셈이다. 그러니 칼에 찔린 상황에서 “형제끼리는 그럴 수 있어. 별 것 아니야. 걱정하지 말고 이리 와서 형 한 번만 안아줘.”라고 말하는 김종구 배우가 더 안타까울 수밖에. 관객이 오랫동안 재현의 고독을 곱씹게 되는 건 김종구 배우 덕분일 것이다.

놀라운 점은 세상 어디에도 없을 양아치를 완벽하게 연기한 김종구 배우가 180도 다른 배역도 소화할 수 있다는 점이다. 거침없이 욕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마담이 순수하고 섬세한 모습을 간직한 문인으로 탈바꿈할 수 있다는 것을 뮤지컬 ‘팬레터’가 증명했다.

뮤지컬 ‘팬레터’ 커튼콜 장면
뮤지컬 ‘팬레터’ 커튼콜 장면

‘팬레터’는 소설가 김해진과 그의 연인 히카루, 사업가 정세훈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다. 극 중 김해진은 조선일보와 중앙일보에 동시 당선된 문인이다. 까다로운 평론가 김문집에게 ‘조선어의 천재’라고 불릴 정도로 재능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어느 날 해진의 글에 깊게 공감한 히카루의 팬레터가 도착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때로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어. 괜찮아. 주고받은 건 편지뿐 얼굴도 모른다 해도. 그냥 알 수 있었지. 같은 그늘 아래 있다는 걸. 우리는 같은 별에서 왔다는 걸.”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히카루지만 자신의 글에 담긴 슬픔을 알아줬다는 것만으로 해진은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 제자인 세훈은 얼굴이 박색이거나 나쁜 사람이면 어떡할 거냐고 묻지만 해진은 편지의 주인이 누구든 상관없다고 말한다.

“만난 적 없어도 그이는 나의 뮤즈. 나의 천사. 언제나 기다려. 다정한 마음. 섬세한 편지. 그이를 만나면 두 손 잡고 말해야지. 그대의 한 줄로 내가 나날을 버티었소.”

관객들로서는 얼굴 한 번 본적 없는 사람을 사랑하게 된 해진이 다소 당황스러울 수 있다. 그걸 알고 있는 듯 ‘팬레터’는 ‘아무도 모른다’ 넘버를 통해 서사를 부여한다. 폐결핵 3기를 선고받은 시한부 해진에게 자신의 고통을 짊어지겠다는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선생이시여. 슬픔을 안고 계시나이까. 그것을 가리기 위해 그리 아름다운 문장으로 성을 쌓으시나이까. 그렇다면 그 슬픔을 나누어주소서. 그리고 거기에 따르는 길을 지시하여 주소서” 자신의 슬픔을 알아준 히카루를 해진이 사랑하게 된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을 터다.

특히 김종구 배우의 해진은 유독 순수하고 다정하다. 작가 특유의 예민한 모습이나 동료 이윤이 보여주는 것처럼 장난스러운 모습도 없다. 작가가 되려면 어떻게 하는 게 좋겠냐는 세훈의 물음에도 다정하고 진실하게 답한다.

“글은 쓰고 있니? 글을 쓰면 그게 작가지 무얼. 작가는 가르쳐지는 게 아니야. 발견되는 거지. 많이 써라. 많이 생각하고.” 다정하게 세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눈이 휘어지게 웃는 김종구 배우를 보며 관객들의 안타까움은 더욱 커진다.

결말이 그에게 녹록지 않다는 것을 아는 이들에겐 더욱 그렇다. 종이에 베인 세훈의 상처를 치료해주며 내뱉는 말은 의미심장할 정도다. “너 종이 조심해야 된다. 종이에 베인 게 칼에 베인 것보다 아프고 오래가거든. 이상하지? 칼도 아닌 것이 말이야. 아마도 흰 종이에 쓴 글이 마음속엔 더 깊이 박혀서 그런가 보다.” 결국 히카루가 쓴 편지들은 그의 마음에 깊이 박혀 큰 상처들을 내고 이야기는 파국에 치닫는다. 히카루가 사실은 세훈이 쓰던 필명이었기 때문이다.

모두의 예상처럼 양치기 소년의 거짓말은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세훈은 결국 해진에게 자신이 히카루였다고 고백하지만 해진은 받아들이지 못한다. 김종구 배우는 자신을 속인 세훈에게 느끼는 배신감과 히카루를 죽인 세훈에 대한 원망을 진정성 있게 토해낸다. “차라리 끝까지 비밀을 지키지 그랬어. 차라리 끝까지 거짓을 말하지 그랬어.” 세훈이 히카루라는 것을 은연중에 느꼈던 해진의 외침은 김종구 배우의 가창력과 함께 더 큰 절규로 관객에게 다가온다.

그래서일까. 극이 끝난 뒤 커튼콜에 등장한 김종구 배우가 눈이 휘어지게 웃으며 노래를 부르는 모습은 하나의 위안과도 같다. 해진 선생님이 조금은 행복해졌을지 모른다는 마음이 들게 하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미성과 탄탄한 연기력을 갖춘 김종구 배우가 뱀파이어 역할을 맡은 작품 ‘배니싱’은 다음 달 31일까지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1관에서 만나볼 수 있다.

이승희 기자 aga4458@k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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