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좋아하세요?] “행복해지기 위해 기꺼이 불행과 동행하겠습니다”
[뮤지컬 좋아하세요?] “행복해지기 위해 기꺼이 불행과 동행하겠습니다”
  • 이승희 기자
  • 승인 2021.01.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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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돋보기-블랙메리포핀스 편
출처=컴인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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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블랙메리포핀스’는 1926년 독일의 저명한 심리학자인 그라첸 슈워츠 박사의 대저택 화재 사건으로부터 살아남은 네 명이 아이들을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다. 동화 ‘메리포핀스’를 모티브로 한 뮤지컬로 나치 정권 아래의 독일, 불타버린 대저택과 안개 속에 사라진 수요일의 기억, 그리고 그 기억으로의 귀로를 담고 있는 심리 추리 스릴러다. 한국, 중국, 일본 등 3개국에서 모두 성공리에 공연을 올린 웰메이드 극으로 대학로에서 많은 팬을 보유한 뼈대 있는 뮤지컬이기도 하다.

2012년 초연 한스 버전과 2016년 헤르만 버전에 이어 2020년은 막내 요나스 버전으로 돌아왔다. ‘블랙메리포핀스’의 주인공인 한스, 헤르만, 안나, 요나스 네남매는 1926년 발생한 화재사건으로 아버지인 그라첸 박사를 잃고 유모인 메리 슈미트에 의해 극적으로 구조된다.

아이들은 당시 충격으로 기억을 잃어버린 채 각각 다른 집에 입양된 채 살아가게 된다. 12년 후 맏형 한스에 의해 남매가 한곳에 모이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관객들에게 가장 인상 깊은 넘버는 가장 처음 나오는 ‘Overture’일 것이다. 극이 시작되자마자 나오는 ‘Overture’는 한스 역할을 맡은 김도빈 배우가 인터뷰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라고 말했을 정도로 아름다운 넘버다. 시각적으로 아름다울 뿐 아니라 가사가 전체 스토리를 관통하고 있어 굉장히 중요한 넘버이기도 하다.

무대는 커튼에 가려져 있고 배우들은 커튼 뒤에서 오로지 그림자를 통해 이야기를 전달한다. 관객은 자신을 위해 마련된 아름답고 환상적인 동화에 저도 모르게 빠져들게 된다. ‘블랙메리포핀스’라는 동화에 홀린 관객들은 극이 진행될수록 깨닫는다. 아이들이 맞닥뜨릴 과거가 사실은 잔혹동화였다는 사실을 말이다.

한 곳에 모인 아이들은 한스의 강요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화재 사건에 대한 진실을 파헤친다. 그러던 중 각자 가지고 있는 조각들을 맞추면서 잊고 있던 기억들을 하나씩 떠올린다. ‘블랙메리포핀스’의 특별한 점은 진실을 찾아가는 여정에 남매들의 어릴 때 모습이 나온다는 점이다. 배우들은 어릴 때와 성인이 됐을 때를 번갈아 가면서 연기한다. 성인이 된 한스는 예민하고 날카로운 알코올중독자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어릴 때는 동생들을 끔찍이 위하는 든든한 맏형이었음을 보여준다. 헤르만과 안나 역시 무언가에 쫓기듯 불안해하는 현재와 달리 과거에는 웃음 가득한 어린아이였다. 공황장애와 언어장애를 앓고 있는 막내 요나스도 어릴 때는 그저 형들과 누나에게 사랑만 받은 귀여운 막내였다. 과거와 현재의 간극이 클수록 화재 사건이 아이들에게 큰 영향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Silent Wednesday’는 ‘블랙메리포핀스’의 스릴러적인 부분을 돋보이게 하는 넘버라고 볼 수 있다. “어제는 내가 뭘 했지. 아무것도 기억 안 나. 이상해 내가 뭘 했지. 사라진 기억.” 어린 헤르만이 사라진 수요일과 관련해 품은 의문을 시작으로 아이들 모두 자신들에게 벌어지는 일을 깨닫게 되는 넘버다. ‘블랙메리포핀스’가 기억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는 점을 극명하게 나타내는 장면이기도 하다.

성인 한스는 자신들을 화재에서 구한 메리 슈미트를 두둔하는 동생들에게 그녀의 수첩을 건네고 진실을 밝힌다. 그를 통해 아이들은 매주 수요일마다 그라첸 박사에게 인체실험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당시 나치 정권 아래서 비밀리에 행해진 실험들이었다. 어떠한 물리적, 정신적 상처를 입어도 최면을 통해 기억을 지운다면 인간은 행복해질 수 있다는 믿음 아래 이뤄졌던 실험들. 그 속에서 아이들은 철저히 유린당했다.

저택에 화재가 발생했던 날 역시 ‘실험의 날’ 수요일이었다. 아이들이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게 되는 날이자 안나의 삶이 산산조각 났던 날이기도 하다. 극은 안나가 어떠한 일을 겪었는지 정확하게 설명해주지 않는다. 그러나 대사를 통해 직접적으로 밝히지만 않을 뿐 관객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안나의 몸짓 및 표정과 아이들의 절규를 통해 말이다. 마지막 수요일에 안나는 그라첸 박사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더 끔찍한 것은 그 모든 상황을 나머지 아이들이 의자에 묶인 채 지켜보고 있었다는 점이다. 안나를 건드리지 말라고, 죽여버리겠다며 악을 지르고 엉엉 우는 아이들의 모습에 관객들은 충격에 휩싸인다. 무대 위 아이들의 고통을 짐작조차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막내 요나스가 안나를 지키기 위해 그라첸 박사를 밀었는데 박사가 죽어버린 것이다. 자신이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에 떨고 있는 요나스를 위해 둘째 헤르만이 나선다. 그리고는 자신을 놓치지 말고 꼭 보고 있으라고 말한 뒤 박사의 사체를 칼로 난도질한다. 어떻게든 막내를 진창에 빠뜨리지 않으려고 모든 걸 짊어지려는 모습에서 관객은 숨죽일 수밖에 없다. 헤르만의 간절함을 읽은 듯 한스도 가세해 요나스를 달랜다. “아버지를 죽인 건 네가 아냐. 형이 똑똑히 봤어. 너는 잠시 기절시켰을 뿐이야. 아버지를 죽인 건 헤르만이야.” 동생을 위해 제 손에 피를 묻힌 헤르만도 절규하듯 말한다. “내 말 똑똑히 따라 해. 아버지는 헤르만 형이 죽였다. 어서!” 필사적으로 자신을 보호하려는 두 형의 모습에 겁에 질린 요나스는 “아버지는 헤르만 형이 죽였다”고 외친다. 동생을 지키려는 형들의 절규와 아버지에게 범해져 망가져 버린 누이. 아마도 지옥이 있다면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 곳에 뒤늦게 나타난 메리를 보며 아이들은 잔뜩 경계하지만, 사실 메리는 박사의 공범보다는 아이들의 구원자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준다. 엉망으로 변한 집을 보고 죄책감을 가지는 모습은 인간적인 메리의 모습이 유독 돋보이는 장면이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건가요. 내 천사들에게. 내가 대체 왜 고통 속에 너희들을 춤추게 했나. 신이여 날 용서하지 마소서.” 아이들을 실험의 대상으로만 대해야 했지만 결국 진심으로 아낄 수밖에 없었던 메리의 모습이 읽히는 대목이다. 돌이킬 수 없지만 어떻게든 수습해보려고 애쓰며 자신을 믿어달라고 애원하는 메리의 모습은 어쩌면 아이들이 언제나 가지고 싶었던 ‘엄마’ 그 자체가 아니었을까. “난 그래도 박사님의 연구를 끝까지 믿었다. 너희가 다 잊고 행복해질 거라고 그렇게 믿었어.” 메리는 진심으로 아이들을 아끼고 사랑했다. 그만큼 조국인 독일도 사랑했기에 실험에 가담했을 뿐. 메리의 진심을 알게 된 관객들은 비로소 조금은 안심하게 된다. 무방비하게 지옥에 던져진 아이들에게 메리라는 썩은 동아줄이라도 남아있다는 사실에.

“최면을 걸어줘. 우리가 아무것도 몰랐던 때로 돌아가게 해줘.” 한스와 아이들의 요청에 메리는 온 힘을 다해 아이들의 기억에 자물쇠를 채운다. 아이들이 비밀을 알게 된 이상 나치 정권에 쫓길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성인이 된 아이들에게 메리는 또 하나의 살길을 마련해준다. 다시 정권에 쫓길 아이들을 위해 거짓 유서를 작성하고 은신처가 될 장소를 일러주기 때문이다. 그 때문일까. 메리에 대한 마음을 갈팡질팡하는 아이들처럼 관객들도 메리 슈미트를 온전히 미워할 수 없었을 것이다.

출처=컴인컴퍼니
출처=컴인컴퍼니

이토록 끔찍한 이야기가 대학로에서 오랜 세월 사랑받은 이유는 단순하다. 그들의 이야기가 불행만을 다루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블랙메리포핀스’는 기억에 대한 이야기다. 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 생각해봤을 것이다. 아픈 기억, 나쁜 기억, 상처받은 기억을 지우고 살아간다면 우리의 인생은 과연 완벽해질 수 있을까? 우린 완벽하게 행복해질 수 있을까? ‘블랙메리포핀스’는 아이들을 통해서 그 답을 관객에게 전하고 있다.

극의 마지막에서 메리가 알려준 은신처로 향한 아이들은 로먼 박사와 만나게 된다. 그리고 다시 한번 기억을 지울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하지만 요나스는 기억을 지우지 않길 원하고 로먼 박사는 묻는다. “당신들 모두가 이 방을 빠져나가는 데 동의하게 되면 당신들은 영원히 지울 수 없는 흉터를 안고 이 방을 빠져나가게 됩니다. 당신들은 늘 불행한 기억과 함께 걷게 됩니다. 정말 동의하십니까?” 아이들은 모두 동의한다. 깨달은 것이다. 단순히 기억을 지운다고 해서 존재했던 과거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며, 잊혀진 과거 때문에 늘 불안에 떨며 현재를 보내야 한다는 사실을. 그래서일까. 마지막 한스의 입에서 나온 말은 관객에게 어떤 대사보다 큰 감동으로 다가온다. “로먼 박사님. 우린 행복해지기 위해 기꺼이 불행과 동행하겠습니다.”

극이 끝나자 관객석 여기저기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단순히 뮤지컬 ‘블랙메리포핀스’가 슬퍼서는 아닐 것이다. 아이들이 겪은 불행과, 그 불행을 대하는 삶의 태도가 큰 울림을 주었기 때문일 터다.

누구나 저마다의 불행을 안고 살아간다. 누군가는 그 불행에 여전히 잠겨있을 수도, 누군가는 아이들처럼 불행을 외면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아이들을 통해 배웠다. 어른이 된 한스와 헤르만이, 안나와 요나스가 알려줬다. 행복이란 불행조차도 외면하지 않고 마주해야만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어릴 적 잔인한 진실을 알게 되기 전 아이들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우리도 행복할 수 있나요?” 메리는 사랑을 가득 담아 말했다. “행복은 마음에서 시작하는 거란다. 행복해질 주문을 외워보자.”

이승희 기자 aga4458@k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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