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위한 공부
나를 위한 공부
  • 박경민
  • 승인 2021.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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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방 지나갈 것 같았던 전염병이 1년이 넘도록 우리의 일상을 위협하고 있다. 친구나 직장동료는 물론, 명절에 한데 모여 즐거움을 나누던 가족의 만남도 제한될 지경이니 자연스레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진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일은 그동안 세상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미뤄뒀던 독서나 공부를 위한 시간이 확보됐다는 점이다. SNS 상에서 교류하는 지인들의 포스트에도 책에 대한 감상이나 논문, 에세이 등에 대한 평가가 올라오는 일이 잦아졌다. 진리에 대한 탐구, 학문에 대한 열정까지는 아니더라도 뭔가를 배우고 익히는 일은 기쁜 일임에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논어의 첫 문장, 공자의 유명한 명언이 머리를 떠올랐다.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 之不亦說乎)’, ‘배우고 제 때 배운 것을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않겠는가’ 정도로 해석되는 말로 새로운 것을 배우고 반복해서 내 것으로 만들어 나가는 공부의 기쁨을 이야기한 문장이다.

인류의 위대한 스승 중 하나로 일컬어지는 공자는 학문에 대해 남다른 생각을 했다. 그는 학(學)과 문(問)을 나눠서 생각했는데 ‘학’은 단순히 지식을 배우는 것, 그리고 문은 그 지식을 내 것으로 체득하기 위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의문을 가지고 물음을 던지는 것으로 보았다.

지식을 쌓는다는 말이 있다. 공자에 따르면 지식은 과거 제한된 시간과 장소에서 특정한 경험 또는 견해를 가진 누군가가 만들어 낸 결과물이다. 바로 이 지식을 배우는 것이 ‘학’이다. 다만 지식을 배우는 사람은 시간과 장소, 경험이 각기 다르다. 각자가 처한 배경도 제각각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현재에서 자신의 입장에서 되짚어 봐야 한다. 비판적인 관점에서 반문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문’이다. 어떤 지식도 완벽하지 않고 한계가 있다는 것, 그 한계를 넘어서는 ‘문’이 있어야만 더 발전해 나갈 수 있다는 것이 공자의 생각이다.

논어 헌문편에 예전에는 자기 자신을 위해 배웠지만 오늘날은 남을 위해 배운다는(古之學者爲己, 今之學者爲人) 구절이 나온다. 혼란스러운 춘추전국시대에 살며 배움의 가치가 퇴색되었다는 평가로 풀이된다. 위기지학(爲己之學)이 스스로를 성장시키고자 하는 공부라면 위인지학(爲人之學)은 다른 사람에게 보여지기 위한 그럴듯한 명성과 지위를 위한 공부를 의미한다. 위기지학은 공부 그 자체가 목적이 된다면 위인지학은 공부를 통해 달성하고자 하는 다른 목적 이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그토록 공부를 힘들어하고 지루해한 이유가 다름 아닌 여기에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학교에 진학하고 학위나 자격증을 따기 위한 공부, 여간 고생스럽지 않았나.

다행스러운 것은 요즘의 공부는 이러한 목적성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졌다는 것이다. 초유의 팬데믹 사태가 불러온 예상치 못한 여유는 우리 스스로를 갈고 닦는 시간을 부여해줬다. 공자는 15세의 나이에 지천명, 학문에 뜻을 두고 그 후 25년 뒤인 마흔에 불혹, 의혹이 없는 경지에 올 랐다. 10년 뒤 쉰에는 하늘의 뜻을 깨달았고 예순이 되어서는 어떤 이야기를 들어도 귀에 거슬리지 않게 되었다고 했다. 세상사 시시비비에 휘말리지 않는다는 의미다. 일흔이 되면 마음이 가는대로 행동하더라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았다고 한다. 욕망과 이성의 불일치가 없는 말 그대로 신의 경지가 아닌가. 그 자체가 목적인 공부, 스스로를 다 잡고 깨우쳐 나가는 기쁨을 느낀 결과다. 혼란스럽고 고민 많은 이때, 나를 위한 공부를 시작해 보는 건 어떨까. 공자의 경지까진 아니더라도 우리의 내면에 귀를 기울이고, 힘듦이 즐거움으로 바뀌는 경험을 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박경민 기자 keaj@k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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