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사스 정전사태의 진상과 교훈
텍사스 정전사태의 진상과 교훈
  • 석광훈
  • 승인 2021.04.12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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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북미대륙에 불어닥친 북극한파로 텍사스는 4일간이나 지속된 사상초유의 정전(순환단전)사태를 겪었고 최소 400만 가구가 혹한에서 이틀이 넘는 정전피해를 겪었다. 정전사태 시작 당일부터 텍사스정가와 미국 언론에서는 ‘풍력발전 원인설’부터 시작해 ‘민영화 원인설’ 등 검증되지 않은 수많은 주장들이 난무했고 이들 주장은 국내언론에도 일부 소개됐다. 정전사태가 발생한 지 2개월에 접어들고 있지만 아직도 사태로 발생한 비용의 처리와 후속대책은 텍사스 주의회에서 논란이 되고 있다. 사태는 아직 완전히 정리되지 않았지만 이 글은 지금까지 확인된 사실들에 기반해 그동안 여과없이 언론지면을 뒤덮었던 온갖 주장들의 진위여부를 확인하고 텍사스사태의 교훈을 도출해 향후 국내 전력산업의 반면교사로 삼고자한다.

풍력발전 원인설

2월 15일 미국 텍사스는 한파로 4일간 지속된 정전사태(순환단전)는 물론 가스전, 상수도 등 주요 시설들이 큰 타격을 받았다. 사태 초기 재생에너지를 반대해 온 미국 공화당 의원들은 “풍력발전이 정전 원인”이라고 비난을 쏟아냈고 월스트리트저널은 한술 더 떠 “텍사스가 석탄
발전과 원전을 더 건설했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그러나 텍사스 전력당국인 ERCOT가 지난해 11월 작성한 녤/2021 동계 공급자원 적정성 평가보고서(SARA Report)’의 기준에 따르면 이번 정전사태 기간 발전원을 가리지 않고 모든 발전설비들이 기대치 이하의 실적을 보였다.

정전 사태기간 풍력의 경우 SARA보고서의 기대치 대비 57%의 실적을 보였고 다른 발전원 역시 가스발전은 55%, 석탄은 58%, 원전은 79%로 대동소이한 결과였다. 오히려 텍사스의 여름기온에 최적화된 가스·석탄화력과 원전설비 대부분 단열처리가 되어있지 않아 한파에 고장을 일으켜 총 30기가와트(원전 30기분량)가 정지하면서 사태를 일으킨 공범이 됐다.

원전도 한파로 급수펌프 압력센서가 고장나 정지하며 사태악화에 일조했다. 실제로 그레그 애벗 텍사스 주지사는 2월 16일 기자회견에서 이 원전의 정지가 인근 텍사스주 최대도시인 휴스턴의 정전사태에 주요 원인을 제공했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국내 일부 보수언론이 “그나마 원전 덕분에 블랙아웃을 막았다”며 이번 정전사태 내내 텍사스 전력공급량의 10%에도 못 미친 원전을 두고 아전인수식 보도는 여론을 크게 오도할수 있다.

민영화 원인설

정전사태 당시 미국 매체들은 텍사스주의 정전사태가 전력산업 ‘민영화’의 결과로 단기적 시장경쟁에 밀려 기후변화에 대한 중장기 대비를 못했기 때문이라고 보도했다. 또한 일부 전기 소비자들의 전기요금 고지서를 근거로 “요금폭등이 일어났다”는 보도도 있었다. 이러한 현지 보도는 국내 언론에도 여과없이 소개된바 있다. 참고로 미국의 다른 주들처럼 텍사스의 전력산업은 애초부터 민간이 주도해왔고 1999년 지역별 민간 독점체제를 경쟁체제로 개방했을 뿐, 민영화라는 개념은 맞지 않다. 결국 이들 보도의 핵심은 경쟁체제를 원인으로 주장한 것이다.

물론 치열한 경쟁에서 비용을 최소화하기 위한 전력사들의 태도를 문제제기할 수 있으나 궁극적으로 이번 사태는 이미 10년 전 유사한 경험을 하고도 에너지설비들의 단열처리 또는 방한설비를 의무화하지 않고 방치해온 전기위원회(이하 PUC), 철도위원회(이하 RRC) 등 당국의 규제 실패에 원인이 있다.

미국의 전력시장개방이 흔히 탈규제(De-Regulation)로도 불려왔으나 실제로는 전력시장개방 후에도 공정경쟁, 소비자보호와 같은 핵심적인 가치들은 주정부별 PUC의 규제에 의해 지속적으로 보장되어왔다.

다만 텍사스주의 강한 정치적 배경으로 인한 규제당국의 자유방임적 태도가 지적될 수 있으나, 경쟁체제 자체가 원인이라는 주장은 사실과 맞지도 않고 기후재난으로 인한 이번 사태이후 대책에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전기요금 폭등론도 소매시장 기준으로 볼 때 텍사스의 주택용 전기소비자중 문제의 요금제를 선택한 소비자들은 2만 9,000호(0.3%)에 불과하며 나머지 소비자들은 약간의 요금이 올랐을 뿐 요금폭등은 없었다.

요금폭등 피해자들에 대해서는 주정부가 개입하며 그리디사의 파산신청 접수 조건으로 소비자들에 대한 정전사태기간 폭등한 요금고지
를 철회하겠다는 입장을 받아냈다. 다만 폭등한 도매요금의 청산문제는 여전히 텍사스 주의회에서 최종적으로 결정되지 않은 상황이다.

사실 문제의 진앙인 그리디의 판매전략은 저렴한 도매전기요금(2020년 평균 약 90원/kWh)을 주택용 소비자들에게 차익 없이 적용하되 매월 10달러의 고정수수료를 받아 수익을 창출하는 특이한 사례다. 그러나 텍사스나 다른 경쟁전력시장이나 이처럼 주택용 소비자들을 변동폭이 큰 도매요금에 직접 노출시키는 무모한 판매관행은 찾기 어렵다.

대부분의 전기판매회사들은 선물거래계약을 통해 헤징을 하며 도매요금 변동의 완충역할을 한다. 때문에 그리디외의 전력판매사들은 고정요금제나 소비자들이 스마트 계량기의 전력소비 데이터로 결정한 맞춤형 요금제를 통해 수익을 얻는다.

고립전력계통 원인설

‘풍력발전 원인설’과 ‘민영화 원인설’에 비해 많이 보도되지 않았지만 텍사스의 독특한 고립전력계통 역시 이번 원인의 하나로 보도됐다. 텍사스주는 전통적으로 연방정부의 규제와 개입을 혐오하는 풍조가 지배적이고 이러한 정치적 배경은 텍사스의 전력계통 고립으로 귀결됐다.

물론 텍사스의 송전망이 주변 주들과 연계돼 있었다면 정전사태를 일부 완화하는데 도움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텍사스정전 당시 이미 주변 전력계통인 남서부전력풀(SPP), 중부대륙독립전력계통(MISO), 멕시코 역시 모두 몰아닥친 한파에 순환단전을 경험하던 상황이었다. 이
들과 계통이 연계되어 있었다 하더라도 도움을 받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실제로 텍사스(ERCOT)의 데이터에는 정전사태 기간 내내 인근 SPP와 연계되어 있던 소규모의 고압직류선로(600MW)가 오히려 텍사스에서 SPP측으로 전력을 공급해왔던 것으로 확인된다. 사실 지난해 8월 정전사태를 경험한 캘리포니아의 경우 주변 전력계통과 연계되어 있었으나, 주변 주들도 폭염과 전력수급불안정을 겪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전력망 운영자인 CAISO측은 더 큰 정전사태를 예방하기 위해 조기에 순환 단조치에 들어간 경우였다. 텍사스와 캘리포니아의 정전사태는 갈수록 심화되는 기후재난이 특정 주를 넘어선 광역 규모로 발생하고 있고, 이는 이웃 전력계통간 연계를 한다고 해서 해소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 것이다. 때문에 텍사스의 전력계통 연계여부는 이번 사태의 핵심적인 원인과 대책으로 큰 지지를 받을 가능성은 없어보인다.

원인은 규제당국의 무사안일주의

이번 정전사태 관련 국내에 거의 소개되지 않은 텍사스주 에너지시장 규제당국의 무사안일주의는 사실상 이번 사태를 관통하는 핵심적 문제였다. 텍사스주는 다른 주들과 달리 에너지시장(전력, 가스)을 전력시장은 공공사업규제위원회(PUC)가 가스시장은 철도위원회(RRC)가 칸막이형으로 분리해 규제해왔다.

이번 사태를 일으킨 직접적 원인 중 최대요인은 가스전으로부터 가스발전소들로의 연료공급 부족 또는 차단으로 정전사태기간 무려 9.3GW에 달하는 가스발전용량이 감발했다는 측면에서 이 두 기관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다.

사실 텍사스주는 2011년 2월에도 유사한 한파와 단발성 정전사태를 겪은 바 있다. 당시 미국 연방에너지규제위원회(FERC)와 북미전력신뢰도위원회(NERC)는 공동보고서를 통해 정전사태의 원인분석과 이들 두 텍사스 규제기관들에 대해 개선조치를 권고한 바 있다.

FERC/NERC 공동보고서의 주요권고사항은 △천연가스 생산 및 처리시설의 최소 단열기준 수립 △순환단전 발생시 가스처리시설에 대한 단전 면제 검토 △가스공급 비상사태 발생시 우선공급 목록에 가스발전소의 포함 △발전시설에 대한 최소 단열기준수립 등이다. 이들 권고는 발전시설만큼이나 상류부문인 천연가스의 생산, 공급시설의 개선을 강조했다.

예를 들어 가스공급시설 중 석유·가스 분리시설은 유전에서 끌어올린 석유, 가스, 물을 분리해 석유와 가스를 각각의 공급처로 보내는 역할
을 한다. 이번처럼 한파가 닥쳤을 때 이들이 단열처리 되지 않았을 경우 분리시설내 물이 동결하며 설비의 작동이 중단되고 가스발전소 등 공급처로 보낼 가스공급량은 차단 된다. 그러나 당사자인 PUC와 RRC는 지난 10년간 이들 주요 권고사항을 모두 무시해왔다. 결국 당시 지적된 문제들은 원전, 석탄화력, 가스화력, 가스공급시설을 가리지 않고 고스란히 이번 정전사태에서 반복되며 당시와는 비교도 안되는 천문학적 피해로 돌아왔다. 결국 이번 사태 이후 PUC는 텍사스 주의회에서 신랄한 비판을 받았고,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위원장 및 위원 3인 전원이 사퇴하게 됐다.

반면 주민선거를 통해 선출되는 RRC 위원장과 위원들은 이번 사태에 대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책임을 지지않고 유임됐다. 이들의 무사안일은 정전사태의 원인뿐만 아니라 정전사태기간 가스공급 부족으로 인한 가스가격의 인상, 도매전력요금이 상한인 9,000달러/MWh 유지되는 천문학적 비용손실까지 일으키기도 했다. 이로 인해 이미 텍사주의 일부 전력사업자들은 파산신청을 했고 정전기간 발생한 천문학적 도매전력요금을 어떻게 청산할지는 아직도 최종적 결정이 내려지지 않았다.

이상기후로 인한 국내 정전사태와 원전정지 경험

텍사스정전사태 이후 국내의 언론보도는 대부분 텍사스 고유의 문제인 것처럼 묘사되고 이 사태가 국내 전력수급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한 분석은 찾기 어렵다. 사실 국내의 경우 공기업인 한국전력과 발전자회사들이 전력공급을 주도하고 있지만 2011년 불과 섭씨 33도의 가을 늦더위에 915정전을 일으켜 전국 753만 호의 소비자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지난해 9월에는 한국수력원자력의 고리 원전 총 5기가 태풍 ‘마이삭’에 변전시설이 고장나 모두 정지되기도 하였다.  ‘치열한 경쟁’과 상관없는 국내 공기업들도 약간의 이상기후에 정전과 발전소 정지를 면치 못한 것 이다.

국내에서는 산업통상자원부가 사실상 자문조직인 ‘전기위원회의’를 통해 전력시장을, ‘원자력안전위원회’가 원전안전을 규제한다. 2011년 915정전 당시 산업통상자원부는 이명박 정부의 “원전으로 고유가 극복”이라는 구호에 따라 수년째 원전이용률 극대화와 전기요금동결
을 추진하던 차였다.

그러나 의도와 다르게 인위적 전기요금 동결은 산업, 가정 모든 부문에서 전기 가열, 건조, 난방수요를 급증시켰고 겨울 전력수요가 여름수요를 크게 앞지르게 만들었다. 발전소들은 정기적으로 정비가 필요한데 발전사들은 여름이 끝나자마자 폭증하는 겨울수요에 대비해 서둘러 대형발전소들을 정지시켜 정비하던 중 늦더위와 수요증가로 정전을 맞이한 것이다.

물론 정전당시 전력거래소 담당자들의 임무 교대과정에서 정확한 정보 전달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점도 일조했으나 당시 상황은 이미 여름, 겨울을 가리지 않고 전력수요가 증가하면서 수급불안정이 상시적으로 지속되던 상황이었다. 시장수급상황과 무관한 인위적 요금억제는 이미 복잡하고 거대해진 국내 전력시장에 맞지 않았고 이상기후에 취약점만 만든 꼴이다.

원자력안전위원회 역시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사실 고리원전은 이미 2003년에도 태풍 ‘매미’에 4기가 정지되는 사고를 겪었기에 지난해 반복된 바닷물에 의한 변전시설 고장은 변명의 여지없이 무사안일주의의 결과다.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에도 침수대책을 포함해 이른바 ‘스트레스 테스트’를 요란하게 진행했지만, 태풍만 오면 원전이 정지되는 허술함은 그대로 남아있던 것이다.

결론

텍사스 사태의 본질은 특정 에너지나 시장질서와 상관없이 기후변화를 무시했을 때 현대사회가 어떤 재난과 혼란을 겪을 수 있는지 총체적으로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이제 세계 각국은 탄소배출 저감노력을 하면서도 동시에 이미 변화된 기후에 적응해야 하는 어렵고 복잡한 상황에 직면한 것이다. 그런데 언론이 ‘탈원전공방’이나 ‘시장담론’ 같은 기존의 익숙한 정치적 맥락에 이번 사태를 끼워 맞추다보면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하고 엉뚱한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우리 사회가 복잡하고 험악해진 기후변화시대에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고 현명하게 헤쳐나가기 위해서는 객관적이고 사실에 입각한 언론보도가 절실하다.

이번 사태는 재생에너지 증가와 석탄화력의 폐쇄가 잘 진행되더라도 기후변화적응을 등한시할 경우 막대한 비용발생이 불가피함을 보여줬다. 참고로 2011년 국내 915 정전사태의 경우 753만 피해자중 증빙자료를 구비한 9,000여 소비자들만 피해보상을 신청했고, 정부는 그마저도 신청액의 12%만 보상하는데 그쳤다. 경쟁체제이든 공기업이든 규제기관이 무능하거나 태만하면 소비자들이 구원받을 길은 별로 없다.

케케묵은 시장담론은 이미 심각해진 기후재난에 경각심을 가져야할 사회구성원들을 엉뚱한 방향으로 이끌게 만든다. 우리가 텍사스를 손가락질하며 여유부릴 상황이 전혀 아닌 것이다.

석광훈 에너지전환포럼 전문위원 keaj@k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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ㅏㅏ 2021-04-15 15:45:35
잘 읽었습니다 대단한 분석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