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의 선택이 가른 역사의 명운, 관산성 전투
순간의 선택이 가른 역사의 명운, 관산성 전투
  • 박경민
  • 승인 2021.12.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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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와 백제 사이에 벌어진 전쟁을 떠올리면 보통 황산벌 전투를 떠올린다. 하지만 삼국통일의 단초가 됐다고 할 수 있는 관산성 전투도 황산벌 전투 못지않게 이야깃거리가 많다. 성왕과 진흥왕의 대결, 동맹과 배신 등 치열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결국 역사는 진흥왕의 손을 들어줬고 성왕은 노비에 의해 비참하게 목이 베이는 수모를 당한다.

역사의 분수령이라고 할 만큼 관산성 전투는 백제와 신라의 미래를 흔들어 놓았다. 삼국통일 이전에 고구려, 백제, 신라의 동맹과 배신이 반복되며 치열한 싸움이 계속 되던 시절, 신라는 관산성 전투에서 승리해 한강유역과 그 이남지역의 주도권을 가져 오게 된다.

관산성전투는 554년 백제와 신라가 지금의 충북 옥천 지방에 있는 관산성(管山城)에서 싸워 신라군이 백제군을 무찌르고 백제 성왕을 죽인 전투다.

전쟁의 시작은 신라의 배신이었다. 나제동맹은 60여 년을 이어져 온 견고한 동맹이었다. 장수왕의 남하정책에 맞서 두 나라는 손을 맞잡고 고구려에게 빼앗긴 영토를 회복하기 위해 애를 쓴다. 백제와 신라는 551년 함께 고구려를 공격해 한강 유역을 하류와 상류로 나눠 각각 차지한다. 그러나 신라 진흥왕은 1년 뒤인 552년 돌연 고구려와 동맹을 맺고 553년 백제를 기습 공격해 백제가 차지한 한강 하류를 빼앗았다.

진흥왕의 배신으로 어렵게 되찾은 한강 유역을 빼앗긴 성왕은 격분한다. 하지만 자신의 딸을 진흥왕에게 시집보내며 동맹을 유지할 것을 제안하지만 거절당한다. 당시 전쟁을 해선 안된다는 귀족들의 말을 들었던 성왕은 결국 신라와의 전면전을 결정하고 554년 태자 부여창(훗날 백제 위덕왕)에게 군사를 내줘 신라를 공격한다.

백제군은 태자 부여창이 지휘하는 주력군 말고도 가야에서 동원한 군사와 왜(倭)의 원병까지 거느리고 있었다. 관산성은 신라가 새로 점령한 한강하류 지역과 연결되는 전략적 요지였다. 백제군은 관산성을 함락시켰다. 신라 의 장수들이 맞섰지만 부여창이 이끄는 백제군이 모두 격파했다.

하지만 승리의 기쁨도 잠시. 전쟁의 판도를 송두리째 바꿔 놓는 사건이 벌어진다. 관산성 점령을 축하하기 위해 홀로 50명의 기병대만을 이끌고 관산성으로 향하던 성왕이 첩보를 듣고 매복중이던 신라군에게 급습을 당해 목숨을 잃는 일이 발생한 것. 관산성 전투의 주도권은 이 때 이미 넘어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삼국사기’는 ‘한 필의 말도 돌아가지 못했다’고 백제의 참패를 묘사하고 있다.

‘일본서기’는 성왕에 대해 “지식이 영매하고 결단력이 있다”고 평가한다. 삼국사기에서도 “천도 지리에 통달해 그 이름이 사방에 퍼졌다”고 극찬한다. 하지만 순간의 실수 또는 방심은 한강유역을, 그리고 삼국통일의 영광을 영영 신라에 내주는 결과를 초래했다.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군은 정치·사회적 측면에서 큰 타격을 입었다. 백제의 유력귀족들은 전쟁을 반대했다고 알려져 있다. 성왕과 태 창은 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일으킨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해야만 했다. 하지만 성왕이 목숨을 잃고 그를 수행하던 인물들까지 목숨을 잃으면서 백제 정치사회는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든다.

전쟁을 반대하는 귀족들 앞에서 왕권의 입지를 더 넓히기 위해서도 성왕과 태자창은 신라에 대한 공격을 성공시켜야 했다. 하지만 관산성을 점령한 것과 상관없이 성왕이 죽게 되면서 처음 전쟁을 반대했던 귀족들의 발언권이 관산성 전투를 계기로 한층 더 커지게 됐다.

또한 고구려에게 비중을 두던 백제의 정책기조는 관산성 전투를 기점으로 신라로 옮겨갔으며, 이후 백제는 가야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고 가야 지역은 신라에 합병되는 결과를 낳았다.

박경민 기자 pkm@k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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