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백에서 수신으로
표백에서 수신으로
  • 박경민 기자
  • 승인 2022.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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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향한 의문이 말살된 자들의 비참한 순응의 태도’

제16회 한겨레문학상을 수항한 장강명 작가의 ‘표백’이란 소설에 나오는 구절이다. 책에서 20대 대학생으로 등장하는 인물들은 다양한 스펙트럼의 배경을 가졌지 만, 누구 하나 진취적이거나 창조적이지 못하다. 긍정의 말들은 찾아볼 수 없고 모두가 패배주의와 염세에 찌들어 있다. 작가가 표현한 사회는 ‘이미 완벽한 흰색이라 어떤 아이디어나 혁신도 불가능한, 어떤 문제점을 지적해도 그에 대한 답이 이미 있는 세상’이다. 그 시대를 살아가는 세대는 ‘표백(漂白)세대’라고 일컬어진다. 아무것도 할 일이 없는, 기성세대가 만들어 놓은 사회적 틀과 합의에 순응하며 그냥 그렇게 살아간다는 의미다. 완벽하게 하얀 세상에 자기를 맞추기 위해 마음속에 품고 있는 질문은 무시하고 정해진 정답을 숙지해 체화하는 과정이 바로 표백이다. 가치나 비전 없이 그저 완벽한 사회가 짜 놓은 틀에 맞추기 위한 노력만을 반복한다. 이는 곧 무기력으로 연결된다.

소설 ‘표백’에서는 시대에 저항하기 위한 수단으로 ‘자살’을 제시한다. 소설을 이끌어가는 등장인물 ‘세연’은 와이두유 리브(Why do you live)닷컴이라는 자살사이트까지 만든다. 무엇을 이뤄내더라도 그것은 성취가 아니라 순응에 불과하다는 인식은 결국 그를 삶의 끝단으로 내몬다. 비관이나 낙심에 따른 자살이 아닌 최고의 성공의 자리에서의 자살은 곧 순교라는 요상스러운 논리로 정당화한다.

저항하기 위해 자신을 버린다는 행동의 말로를 재단하기는 어렵다. 분명한 것은 죽으면 모든게 끝이라는 것. 다만 소설에서는 가업승계가 유력한 재벌, 회계사 시험에 합격한 고시생, 명문대 대학원에 합격한 학생 등의 자살선언이 이어진다. 성공은 자살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한다. 자살사이트의 회원수는 100만을 향한다. 희망이 없는 삶들이 모였다가 저물어간다.

내면의 가치를 찾아라. 너는 너로써 소중하다. 우리의 삶은 의미가 있다. 힘이 되는 말이지만 크게 와닿지 않을 수 있다. 의미없이 연명하며 푸념하고 버티고 사는 이들도 많다. 꿈이 없고 희망도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시대를 막론하고 이어져 온 질문이다. 잘 살고 있는가. 누구나 스스로 반추해보는 질문이다. <표백>이 말하려는 어딘가에 있을 질문이다.

엄혹하던 시기, 청년들은 사회 변혁의 선두에 서 있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이나 군사독재시절, 민주화 운동 뿐만 아니라 해외 각국의 사회 운동에는 모두 청년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달라졌다. 자유와 민주주의가 획득된 시대, 더 이상의 사회 발전을 위해 힘쓸 이유가 없어 졌다는 진단도 있다. 우리나라에서 부모님보다 못 사는 첫 번째 세대가 될 것이란 우울한 전망과 함께 변화와 혁신보다는 안정을 추구하는 청년들이 많아졌다. 대학에 진학해도 극심한 취업난이 기다린다. 집값 상승으로 주거는 더욱 불안정해졌고,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좋은 일자리를 찾기 도 어려워졌다. 사회에 참여해 목소리를 낸다? 취업난을 야기한 사회에 돌을 던지며 투쟁한다? 쉽게 생각하기 힘든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책에서와 달리 청년들이 마냥 사회가 짜놓은 체스판의 말 역할만을 하고 있지는 않다. ‘할 말은 하는’ MZ세 대의 행태가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고, 온라인 커뮤니티와 SNS의 여론을 주도하고 있다. ‘90년생이 온다’라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MZ세대가 언론에 화제가 되는 등 청년들의 생각과 목표에 관심이 커지고 있다. 만 25세의 청년이 청와대 청년비서관으로 일하고, 만 36세의 청년이 대형정당의 대표가 됐다. 청년들이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던 ‘공정과 정의’는 정치권의 키워드로 자리잡았다. 대선 정국에서도 MZ세대를 캐스팅보트로 보고 이들의 표심을 잡기 위한 다양한 시도들이 나올 정도다. 기성세대가 반응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여전히 젊은이들은 다양한 삶의 자리에서 마주하는 고민들과 싸우고 목소리를 내고 있다. 다만 청년세대가 진정한 사회 변혁의 리더가 되기 위해선 세대 통합적인 이슈를 발굴하고, 대안적인 가치로 무장해야 한다. 단순히 선거철 반짝 활용되고 말아서는 안된다. 소설의 ‘표백’이 아닌 깊이있는 생각과 성찰, 끊임없는 가치 추구를 통한 수신(修身)의 노력이 필요하다. 청년에게 의지도, 희망도 없는 시대는 없다.

박경민 기자 pkm@k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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