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은, 두려움은 어디에 있는가?
희망은, 두려움은 어디에 있는가?
  • 박경민
  • 승인 2022.03.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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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에는 희망봉이 있다.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로 가는 신항로를 개척했다는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바스코 다 가마는 그곳을 지나며 인도로 가고 있다는, 갈 수 있다는 희망을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영화. ‘피아니스트의 전설’은 시종일관 그 희망을 안고 나아간다.

유럽과 미국을 오가는 수 많은 이들은 배 위에서 미국의 상징 자유의 여신상을 바라보며 희망을 품는다. 미국이 인생을 풀어갈 마지막 남은 유일한 희망인 사 람도, 그저 유럽으로 되돌아 가기 전에 잠시 정박하는 선원도 물이 아닌 뭍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희망을 품는다.

호화여객선 버지니아호에서 자란 주인공의 이름은 1900이다. 나인틴헌드레드. 누군가에 의해 배에 버려진 갓난아기, 아들처럼 키워준 선원이 그를 발견한 연도가 1900년도라서 붙여진 이름이다. 배 안 연회장에서 울려퍼지는 음악을 듣고 나중에 그를 피아노 연주로 재현하는 천재로 등장한다. 그를 처음 발견한 선원 대니에게도 1900은 희망이었다. 어찌보면 쳇바퀴 돌듯 무료하고 고단한 일상 속에서 1900은 분명 활력소였다. 1900의 세계는 대니로부터 나왔다. 엄마를 알 수 없는 그에게 엄마는 경주를 가장 잘 하는 말이고, 그렇기 때문에 믿을만 하다고 이야기 하는 부분에서 우리는 1900의 제한된 세계를 느낄 수 있다. 사고로 대니가 운명을 달리하고 나서 1900의 음악활동은 시작된다. 한 번 들은 곡을 바로 연주하고 즉흥곡에 능한 그는 명성을 떨치게 된다. 하지만 그의 세계는 버지니아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30여 년의 세월동안 그는 배에서 생애를 보내고, 배의 수명이 다하며 1900도 함께 사라지게 된다.

하지만 1900은 분명 육지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모두가 자리를 비웠을 때 육지의 사람에게 아무렇게나 전화를 걸어 대화함으로써 궁금증을 해소하려고 하는 것이나, 육지에서 바다를 바라볼 때 들린다는 바다의 목소리에 대한 기대와 호기심, 그리고 그가 유일하게 음반으로 남긴 곡의 모티브가 된 한 소녀에 대한 사랑, 배에서 내리기로 결정한 이후 친구와 소소하게 미래에 대해 상상하고 계획했던 데에 이르기까지 1900은 육지를 소원하고, 희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배에 남는다. 전쟁이 끝나고 배를 폭파시킬 때까지 그는 배에 남아 혼자 연주를 한다. 친구와 나눴던 마지막 말에서 그는 제한된 세계에 대한 애착과 끝없는 세계에 대한 두려움을 이야기한다. 육지라는 자신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큰 배에서 정제되지 않은 연주를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피아노를 봐. 건반은 시작과 끝이 있지. 어느 피아노나 건반은 88개야. 그건 무섭지가 않아. 무서운건 세상이야.”

끝없이 펼쳐진 길, 수많은 사람들 배 위의 다른 사람들로 대변되는 우리가 그곳을 바라보며 무한한 희망과 꿈을 얻는 반면에 1900은 그곳에서 관계를 맺고, 가정을 꾸리고, 생활을 해 나가길 꺼린다. 확신이 없는 선택을 결국 그는 거부한 것이다. 수백만 개의 건반과 어우러지는 삶에 대한 두려움이 컸다. 어쩌면 돈벌이의 대상이 되어 현실에 찌들어 살다가 녹초가 되어 스러지는 삶을 원치 않았을 수도 있겠다.

1900이 배에서 내리기로 결정하고 계단을 반쯤 내려갔을 때, 그는 모자를 던진다. 그 모자가 바다가 아닌 육지로 떨어졌다면, 그는 계단을 마저 내려가 땅을 밟았을지도 모른다. 그의 두려움은, 그의 희망은 어디에 있었을까? 우리는 무얼 두려워하고 무엇에서 희망을 느끼는가? 행복을 찾기 위해 더 많은 건반 속으로 뛰어들고 있는건 아닌지, 수백만 개의 건반 위에서 휘영청 위태롭게 버둥거리고 있는지, 아름다운 선율의 음악에 더해 여운이 남는 시간이었다.

박경민 기자 pkm@k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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