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공급과 전기요금의 거버넌스
전기공급과 전기요금의 거버넌스
  • 박진표
  • 승인 2022.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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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전 체제의 위기

우리나라 전력생태계에서 가장 핵심적인 기업 하나를 꼽으라면 단연코 한국전력공사다. 한전은 전기사업법 상 전기판매사업자로서 발전사업자들로부터 전력을 구매해 전기소비자들에게 공급하는 역할을 한다. 우리나라에서 전기판매사업 허가는 한전에게만 부여돼 있으므로, 국내 전력공급체계의 독점 플랫폼 사업자로 평가할 수 있다.

현재 한전은 전례 없는 수준의 재무적 위기에 처해 있다. 심각한 글로벌 에너지 위기로 인해 전력구매비용이 급등하고 있지만, 전기요금은 사실상 동결된 것이나 다름없어 막대한 적자가 발
생하고 있다. 현재 한전은 막대한 규모의 회사채와 기업어음을 발행하며 전기요금 수입으로 부족한 운영자금을 충당하고 있다.

이처럼 어려운 환경에서도 한전이 금융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해 전기판매사업을 영위할 수 있는 것은 국영기업이기 때문이다. 한전은 국가 신용도라는 후광에 힘입어 지금까지는 위기를 어떻게든 견뎌내고 있다. 만약 한전이 민간기업이었다면 생존은 장담하기 어려울 것이다. 국영기업이라는 족쇄 탓에 전기요금을 제대로 받지 못해 재무적 위기가 발생했지만 국영기업이라는 지위 덕에 재무적 위기를 버틸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그만큼 국가 신용도를 훼손하고 금융시장을 교란하는 부작용도 초래하고 있지만 말이다.

만약 글로벌 경제위기가 확대되고 그 과정에서 우리나라의 국가 신용도가 크게 떨어지는 순간이 온다면, 그렇지 않더라도 한전의 부채 규모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른다면, 한전의 신용도 역시 크게 하락해 생존이 불가능한 사태가 발생할 개연성이 있다. 그러한 사태가 발생한다면 국내 전력생태계에는 어떤 파장을 미칠까? 추측하건대 발전사들은 한전에 전력을 공급하더라도 전력거래대금을 지급받을 수 없으므로 전력을 생산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설령 발전사들이 전력을 생산하더라도, 유일한 거래처인 한전의 재무적 불확실성으로 인해 발전사 자신의 신용도 또한 크게 하락해 연료공급사들로부터 연료공급을 받거나 금융시장에서 연료구매자금을 조달하는 데에 큰 제약을 겪게 될 것이다.

결국 한전을 중심으로 구축된 우리나라 전력공급체계는 갈수록 불확실성이 커지는 국가 신용도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는 형국이다. 그리고 한전은 전기의 생산과 소비를 매개하는 독점 플랫폼 사업자이므로 무너진다면 현행 전력공급체계는 그와 동시에 기능이 정지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전력공급체계의 총체적 붕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한전 체제를 냉정하게 평가하고 필요하다면 무언가 대안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다.

한전 체제의 특성

우선 한전 체제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한전이 어떻게 해서 현재와 같이 국가와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는지, 나아가 한전과 국가의 관계가 지금까지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를 살펴봄에 있어서 한전의 두 가지 특성, 즉 사업목적 측면의 특성과 거버넌스 측면의 특성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사업목적 측면에서 한전은 전기사업을 수행하는 유틸리티 기업이다. 그리고 거버넌스 측면에서 한전은 국가가 다수 지분을 보유하며 경영진 선임권을 행사하는 국영기업이다. ‘공공기관
운영에 관한 법률’ 상으로는 공기업으로 분류된다.

유틸리티 기업으로서의 한전

역사적으로 전기사업자가 국가와 상당히 얽히게 되는 것은 유틸리티 기업으로서의 숙명이다. 유틸리티 기업은 일반적으로 정부와 규제협정(Regulatory Compact)이라 불리는 가상의 계약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규제협정 하에서, 정부는 비효율적 중복 투자를 방지하기 위해 단일 기업에 공급구역 내 독점사업권을 부여하는 대신에 엄격한 요금규제를 적용해 소비자의 이익을 보호하고자 한다.  유틸리티 기업은 정부로부터 공급구역 내 독점사업권을 부여받고 안정적으로 보장된 규제요금을 적용받아 투자자들은 안정적으로 투자금 회수를 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규제협정은 에디슨의 조수로 시작해 후에 미국 시카고에 기반을 두고 미국 전역에 걸쳐 전력산업제국을 건설한 사무엘 인설(Samuel Insull)이 1900년대 초 고안해 낸 것이다. 그레
천 바크의 ‘그리드(The Grid)’에 잘 묘사되어 있듯이, 지자체들이 민영전기회사의 높은 전기요금으로 인해 각기 전력회사를 설립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인설은 지자체들을 상대로 낮은 가격에 전기를 공급하겠다고 약속하면서 자신의 전기회사들에게 지역 독점사업권을 부여하도록 설득했다.

인설은 전기를 소수가 아닌 대중을 위한 재화로 보았고 전력산업은 자연 독점이 성립하는 산업이라고 설파했다. 이를 통해 인설의 전기회사들은 여러 분산된 전력망들을 단일 공급망으로 통합해 중앙집중식 공급체계를 구축함으로써 전기공급단가를 낮출 수 있었다. 만약 전기사업의 본질을 꿰뚫는 인설의 통찰력이 없었다면, 전력산업은 수많은 공장, 건물과 주택의 부지, 지하 또는 인근에서 발전기들을 운영하는 형태의 매우 산만하고 비효율적인 산업으로 남았을 것이다. 이러한 비즈니스 모델은 아마도 전기서비스 제공보다는 발전설비 제공에 가까웠을 것이다.

이렇듯 규제협정을 통해 독점사업권과 안정적 수익이 보장되자 전력산업에 대규모 투자금이 유입됐고, 이는 전력산업 초창기 전기회사들이 대규모 발전소들과 광범위한 전력망을 구축하는 데에 소요되는 막대한 인프라 비용을 충당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전기 공급의 확대에 크게 기여했다. 비록 사무엘 인설이 구축한 전력산업제국은 대공황의 여파로 붕괴했고 그 역시 1938년 7월 ‘바스티유의 날’ 축제를 보러 가던 중 파리의 한 지하철역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져 사망했지만, 그의 유산은 살아남아 미국 전역에 전기 공급을 가능하게 했고 그가 수립한 비즈니스 모델 역시 오랜기간 강력하게 작동했다.

독점사업권 부여를 통해 공급단가를 낮춰 보편적 공급을 달성하고자 하는 규제협정은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 국가의 유틸리티 기업에 대한 진입규제와 요금규제의 초석이 됐다. 이를 고
전적 유틸리티 모델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고전적 유틸리티 모델은 전기의 보편적 공급에 대한 강력한 요구가 존재하고 규모의 경제가 작동하던 시기에 매우 강력하게 작동했다. 한전의 전통적 비즈니스 모델 역시 기본적으로는 고전적 유틸리티 모델이었고, 현행 한전 체제 역시 전력산업구조개편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고전적 유틸리티 모델의 대부분을 간직하고 있다.

발전부문을 제외한 전력구매-송전-배전-전기판매 부문은 여전히 한전에 독점적으로 귀속된 채로 유지되고 있다. 비록 2000년대 초반 전력산업구조개편 추진 과정에서 한전의 발전부문이 여러 자회사로 분리됐고 민간 발전사업자들도 지속해서 진입했지만, 전력을 구매할 수 있는 전기판매사업 권한은 (구역전기사업자 등 특수한 예외를 제외하고는) 한전이라는 단일 사업자에게 집중되어 있다.

그 결과 전력거래소가 운영하는 도매전력시장은 전력구매자의 입찰 없이 발전사의 입찰만 존재하는 평면적 경쟁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다. 더욱이 원자력, 석탄 등 기저전원 발전기에 대해서는 정산조정계수에 의한 수익규제가 적용되고, LNG 발전기에 대해서는 자유로운 가격입찰이 허용되지 않고 사전 비용평가에 의한 가격입찰 규제가 적용되고 있다. 이처럼 발전부문의 경쟁 역시 지극히 제한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국영기업으로서의 한전

한전과 같은 유틸리티 기업에 대해 국가가 소유권을 가지고 경영권을 행사하는 것은 당연할까?

앞서 미국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유틸리티 기업이라고 해서 국영기업으로 운영돼야 할 논리적 필연성은 없다. 정부가 진입규제와 요금규제를 통해 유틸리티 기업의 사업 수행 방식을 제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전력산업은 어떤 계기로 국영화됐을까?

1898년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전기회사인 한성전기회사는 조선 황실의 전액 출자에도 불구하고 민간회사로 설립됐고, 운영계약과 저당권설정계약에 의거해 미국 사업가인 콜브란이 경영권을 행사했다. 일제강점기에도 여러 민영 전기 회사들이 한반도의 전력산업을 지배했다. 1930년대 초 한반도 전역에 63개의 전기회사들이 전기사업을 영위했는데, 이들 대부분은 일본 재벌이나 한반도 내 일본인 유지들이 설립한 민영기업이었다. 이들은 도시 인근에 소규모 화력발전소를 건설하고 생산된 전기를 공장용 동력과 도시 가정용 전등 수요에 공급했으며, 발전-송전-배전을 겸업하는 형태였다.

당시 조선총독부의 전력산업정책은 ‘1지역 1사업주의’의 진입규제와 전기요금 인가제를 채택하고 있었다. 그런데 1920년대부터 평양, 부산, 경성(서울) 등지에서 전기 서비스에 대한 불만이 불거지며 전기소비자들을 중심으로 전기요금인하운동이 촉발되고, 나아가 전력산업 공영화 운동으로 발전했다. 하지만 당시 조선총독부는 1930년대 초 국가자본 부족 문제에 직면해 일본 민간자본을 유치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해 전력산업 공영화론을 채택하지 않았다. 대신에 대규모 전원개발과 효율적 전력망 구축을 목표로 전력공급체계를 변화시키는 전력통제정책을 추진했다.

1932년 2월 조선총독부 제령1호로 제정된 조선전기사업령은 전력통제정책 실행을 뒷받침하기 위한 것이었다. 전력통제정책의 핵심은 당시 기준으로 화력발전보다 값싸고 풍부한 전원인 대형 수력발전소 건설과 그 생산 전력 수송을 위한 한반도 내 송전망 구축에 있었다. 당초 전력산업 공영화론을 일부 수용해 송전선로는 국영기업이 건설하는 원칙(송전간선 국영 원칙)이 수립됐지만 국가재정 사정 상 실현되지 않았고, 여러 민간 전기회사들이 출자한 조선송전과 조선전력 등에 의해 주도됐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일본제국은 전시 총동원체제로 전환하면서 경제체제에 대한 국가의 전면적, 직접적 통제가 가해졌다. 일본의 군부와 관료는 조선총독부에게도 한반도 경제를 전시 경제로 재편성할 것을 요구했다. 인력 동원을 위한 황국신민화와 내선일체 이데올로기가 강요되는 가운데, 군수산업 지원을 위한 전력산업이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총독부 관료들은 조선의 특수성을 무시한다는 이유로 저항했지만 결국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1943년 3월 조선전력관리령 제정을 통해 전력의 증산과 합리적 배급을 위한 국가통제가 수용됐고, 이를 실행하기 위한 회사로 조선전업이 설립됐으며 기존 전기회사들은 대부분 조선전업에 통합됐다. 하지만 정책 수립 과정에서 닛치츠를 중심으로 한 한반도 내 전기사업계는 ‘일본에서는 관청이 머리, 회사는 수족에 불과하다는 평판이 있다’며 일본 전력국가관리의 관료적 통제의 병폐를 지적했고, 이에 총독부는 조선전업의 자본 및 경영진 구성을 사실상 민영회사와 다를 바 없도록 사업자들을 배려했다.

1945년 해방 후 이어진 남북분단은 남한의 전력산업구조를 매우 취약하게 만들었고 실제로 전력위기가 빈번하게 발생했다. 일제강점기 주요 발전소들이 대부분 북한에 편재해 있었기 때문이다. 6 · 25 전쟁 과정에서 다수 발전시설들이 파괴된 것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전쟁기간 동안 격전이 벌어졌던 5만 4,000kW의 화천수력발전소가 종전 직후 남한 최대의 발전소였다.

해방 후 일본인들이 보유했던 전기회사 주식이 남한 정부에 귀속됨에 따라 남한의 전기3사, 즉 조선전업, 경성전기와 남선전기는 정부가 경영진 임명권을 장악하게 됐고 그에 따라 사실상 국영기업으로 간주됐다. 이들 전기회사를 국영화할 것인지 민영화할 것인지에 대한 상당한 논란이 벌어졌다. 당시 전기3사의 경영난이 심각했는데, 이는 정부가 경영진을 임명하고 예산도 정부 승인을 받아야 했던 것에서 비롯된다. 특히 전기요금에 대해 국회 동의를 받도록 하면서 국회가 공공요금 인상 억제를 이유로 원가 미만의 전기요금을 강요했다.

장면 정부와 이후의 5 · 16 군사정부는 우선 전기3사의 경영난 해소를 위해 한국전력 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전기3사를 한전에 통합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민간 주주도 한전 주식을 보유했는데, 1970년대 중반 이후 전력산업 국유화 기조가 강화되면서 1982년 1월 한전은 주식회사에서 100% 국영기업 형태로 공사로 개편됐다. 이후 정부가 공기업 민영화 방침을 세움에 따라 1989년 한전은 주식회사 유사체제로 변경됐고 2000년대 미완성 전력산업구조개편을 거쳐 현재와 같은 지분구조를 갖추게 됐다.

한전 체제의 문제점과 취약점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한전 체제는 유틸리티 기업으로서의 속성과 국영기업으로서의 속성이 혼합돼 있다. 한전의 국영기업 속성은 정부의 암묵적 보증을 통해 신용도를 국가 수준으로 높여 저금리로 자금을 조달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금융비용을 줄이는 데에 기여한 측면이 있다. 무엇보다도 건국 이후 국내 민간자본이 거의 축적되지 못한 상황에서 한전이 대규모 발전소를 비롯한 전력공급체계 구축에 소요되는 막대한 자금을 조달하는 데에 기여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국영기업 속성은 전체적으로는 한전, 나아가 우리나라 전력생태계에 많은 폐해 또한 끼쳐왔다. 이러한 폐해는 전력생태계가 고도화될수록, 전력산업 패러다임의 변화에 대한 요구가 강해질수록 더 크게 나타나고 있다. 주요한 폐해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한전의 전기사업자로서의 정체성이 희석되고 있다. 한전은 그 역할로 보나 역사로 보나 국영기업이기에 앞서 전기사업을 영위하는 사업체로서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한전은 국영기업으로서 정치적 요구를 충실하게 이행하기에 앞서 국내에서 지속가능한 전력생태계를 구축하고 유지하는 역할을 다해야 마땅하다. 한국전력공사법 제1조 또한 전원개발 촉진과 전기사업의 합리적인 운영에 의한 전력수급 안정이 한전의 본질적 사명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러나 ‘공공기관 운영에 관한 법률’에 따라 한전의 주요 경영진은 일반 주주가 아니라 정부에 의해 임명되고 있다. 한전 경영진과 임직원의 보수 역시 경영 실적보다는 공공기관 경영평가에 좌우되고 있다. 그로 인해 한전의 경영은 정부의 입김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은 전기요금 인상문제에서 대표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일제강점기 당시에도 조선의 전기회사들이 조선총독부의 전력산업 정책에 반기를 들며 자신의 목소리를 분명히 내었던 것과 대조적이다.

둘째, 한전의 민간 주주들이 희생되고 있다. 비록 정부가 한전의 과반수 지분을 보유하고 있더라도, 과반수에 가까운 나머지 지분은 민간 주주들이 보유하고 있다. 한국전력공사법상 한전에
대해 상법의 주식회사 규정을 적용하도록 하는 이상, 원론적으로 한전 경영진은 한전에 대해 충실의무를 부담하며 이를 통해 한전의 민간 주주들은 자신의 이익을 보호받을 수 있다. 하지만 국영기업임을 명분으로 정부가 정치적 또는 정책적 사유로 한전 경영에 개입하는 이상, 민간 주주들은 이익을 보호받기 어렵다. 실제로 정부의 과도한 전기요금 인상 억제로 인해 한전의 재무구조가 악화됨에 따라 민간 주주들은 주식가치와 배당 측면에서 큰 재산적 손실을 겪고 있다. 이는 한전 경영진과 정부를 배임 등 민간 주주들에 대한 법적 책임에 취약하게 만든다.

또한 외국인 주주들이 정부를 상대로 국가투자자분쟁(ISD)를 제기할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한전의 취약한 거버넌스와 불합리한 전기요금 의사결정 프로세스로 인해 한전 체제가 가지는 법적 위험은 결코 낮은 것으로 평가할 수 없다.

셋째, 우리나라의 에너지안보 대응능력을 심각하게 약화하고 있다. 미국, 유럽, 일본 등 세계 곳곳에서 전기요금이 급등하고 올해 블랙아웃 가능성도 공공연하게 보도되고 있다. 이와 같이 글로벌 에너지 가격은 소비자들에게 에너지 소비를 줄이라는 경보를 요란하게 울리고 있지만 우리나라 전기요금은 우리에게 아무런 신호도 보내고 있지 않다. 국가가 전기요금을 지나치게 통제함으로 인해 전력시장의 가격 시그널이 전기소비자에게 도달하는 경로가 차단돼 전기소비자들이 전기 절약 인센티브를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현재와 같은 글로벌 에너지 위기 하에서 우리나라의 에너지 안보를 더욱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

현재와 같은 글로벌 에너지 위기 상황에서, 만약 인위적으로 왜곡된 전기요금을 계속 유지한다면, 에너지 재고가 일찍 소진되어 혹서 또는 혹한기에 전기 부족 사태가 발생할 현실적 우려가 있다. 이는 결코 기우가 아니다.

넷째, 우리나라 전력생태계 붕괴에 일조하고 있다. 우리나라 전력시장은 비용기반시장(cost-based pool, CBP) 형태로 운영됨에 따라 급전순위 결정을 위한 변동비 항목을 결정하고 산정하는 작업과 용량가격의 반영요소를 결정하고 산정하는 작업 등을 인위적으로 수행해야 한다. 정산조정계수 제도는 인위적인 전력거래가격 조작이 얼마나 당연시되고 있는지 보여주는 주요 사례다.

계통제약운전 시 발전기를 돌릴수록 손실을 입게 하거나 용량계수를 변경해 용량요금 규모를 고무줄처럼 늘렸다 줄이는 등 전혀 합리적이지 않고 일관적이지 않은 행태가 여전히 되풀이되고 있다. 이렇듯 우리 전력시장을 특징짓는 비합리성, 비일관성, 그리고 절차적 불투명성과 같은 착취적 요소는 전기요금 인상요인 억제, 한전의 재무구조 악화 방지 등과 같은 정치적 또는 정책적 목적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는 우리나라 전력생태계의 핵심을 담당하는 한전을 국가와 얽힌 운명공동체로 만들어 자칫 국가 재정 상태에 따라 국내 전력생태계 전체가 붕괴될 수 있는 위험을 초래한다. 나아가 전력생태계 작동방식의 공정성을 훼손하고 또한 전력생태계 참여자의 투자회수 가능성을 매우 불확실하게 만듦으로써 장기적으로 국내 전력생태계의 탈탄소, 디지털 미래 역시 매우 어둡게 만들고 있다.

한전 체제의 문제점 고치기

20세기 초 고전적 유틸리티 모델의 성공 사례는 현대 IT산업의 성공요인과 마찬가지로 기술자본(전력기술), 사회자본(법제도)과 금융자본(투자)이 성공적으로 결합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재 한전 체제를 구성하는 국영기업 속성은 유틸리티 기업 속성과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전력생태계 내 사회자본을 침해해 금융자본의 전력생태계 진입을 어렵게 하고 나아가 기술
자본의 축적을 저해하는 부작용을 초래하고 있다.

전력생태계 내의 이러한 후진적 자본 이탈의 악순환을 차단하기 위해서는 우선 한전의 국영기업으로서의 속성을 제거하거나 약화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력산업의 거버넌스를 재구축함으로써 전력생태계 내에 사회자본이 축적되도록 할 필요가 있다.

원칙적 접근법에 입각한 요금규제

한전을 국영기업으로 간주해 전기요금에 대해 과도한 정치적 또는 정책적으로 접근하는 것을 지양하고 전력생태계의 지속가능성을 위한 원칙(priniciples)에 입각한 접근법을 채택해야 한다. 유틸리티 기업의 요금설계에 있어 정부에게 상당한 정책적 재량권이 부여되어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사유재산제와 시장경제질서를 채택하고 있는 법치국가의 요금규제라면, 헌법 상 기본권인 사업자의 재산권과 직업수행의 자유 또한 존중하는 방식으로 결정돼야 한다.

전기요금에 대한 원칙적 접근법의 모범사례는 법의 지배(rule of law)를 국가원리의 근간으로 삼고 있는 미국의 요금규제 판례에서 찾을 수 있다. 

미국에서는 오래 전부터 요금규제의 위헌성과 위법성이 문제됐는데, 미국 연방대법원은 Federal Power Commission v. Hope Natural Gas Co. 사건(1944년)에서 에너지산업의 요금규제에 대한 사업자(내지 투자자)와 소비자 간 이익 균형의 잣대로 적정성과 합리성 기준(just and reasonable standard)을 확립했다. 구체적으로는 요금규제의 위헌성 심사요건으로 사업자의 성공적인 운영(to operate successfully), 재무적 안정성의 유지(to maintain its financial integrity), 자본의 유치(to attract capital), 그리고 투자자의 리스크 보상(to compensateits investors for the risks assumed)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기준 하에, 전력산업과 가스산업의 자유화 이전, 미국 연방에너지규제위원회(Federal Energy Regulatory Commission)는 성실하고 능률적인 경영을 전제로 서비스 공급에 소요되는 적정원가와 서비스에 공여하는 자산에 대한 적정투자보수를 사업자에게 보상하는 총괄원가방식(cost-of-service rates)을 요금규제의 기본으로 삼았다.

물론 전기요금규제에 총괄원가방식이라는 단 하나의 원칙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여러 다양한 원칙을 정책적으로 고려할 수 있다. 하지만 어떠한 원칙을 채택하든 간에 그때그때의 정치적 사정을 이유로 요금규제의 원칙을 준수하지 않고 임기응변으로 요금을 정하거나 사업 운영의 성공과 재무적 안정성, 투자자의 리스크에 대한 보상을 도외시하는 요금규제는 법적 리스크에 취약할 뿐만 아니라 전력생태계 전체의 지속가능성을 위태롭게 함은 분명하다.

독립 에너지규제위원회 설치

지속가능한 전력생태계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전력산업 규제의 독립성 · 전문성 · 책임성 그리고 투명성이 확보돼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독립 에너지규제위원회를 중심으로 한 거버넌스
재구축이 요구된다. 에너지규제위원회의 독립성 유지를 위해서는 에너지규제위원회가 그저 정부의 정치적 의사결정을 맹종하는 또 하나의 관료 조직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해 에너지규제위원회가 기존 행정조직의 위계질서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야 한다. 위원들의 추천 경로를 다양화하는 것이 그 실효적 대안이 될 것이다.

위원들을 에너지규제 업무에 풍부한 경험과 식견을 갖춘 전문가로 구성해 위원회의 전문성을 제고해야 한다. 이때 정보나 전문성이 사실상 위원장과 스태프들에게 편재되지 않도록 비상임위원의 권한을 보장하는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위원회의 의사결정은 전력생태계에 대한 경제적 · 기술적 · 법적 원리에 입각해 이루어져야 한다. 독단적이거나 비합리적으로 이루어진 의사결정은 재량이라는 이유로 용인되어서는 안 되며 미국 등 선진국처럼 엄격한 사법심사를 받도록 해야 한다.

위원회가 업계의 이익에 포획되는 경우 외부에서 이를 감시하거나 견제할 방법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위원회의 투명성 제고가 요구된다. 위원회 의사결정의 과정과 결과, 그리고 결과에 이른 논리가 상세하게 공개돼야 하며, 전기소비자 등 이해관계자들이 위원회에 공식적으로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절차가 마련돼야 한다.

전력산업의 필연적 운명, 엑소더스(Exodus)

기업이 국가의 손아귀에 놓이는 상황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기업이 가지는 사명을 생각한다면 대단히 불행한 일이다. 재무부서 출신의 CEO들은 그다지 동의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기업의 목적은 그저 재무적 이익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기업은 끊임없는 혁신을 통해 소비자들의 효용을 충족시킴으로써 사회의 발전에 기여하는 데에 목적이 있다. 만약 기존 관습을 되풀이하는 방식으로 사업을 영위해도 된다면, 정부나 종교단체가 직접 사업을 영위해도 동일한 성과를 낼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기업가의 존재가 천상에서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것은 그들이 거두는 이익의 규모보다는 그것에 의해 드러나는 세계를 크게 혁신시킨 공헌 때문이다. 기업과 국가는 원래 서로 다른 길을 갈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국가와 기업이 적지 않은 지점에서 충돌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국가의 지배적 원리는 사회를 안정시키는 통치에 있지만 기업의 지배적 원리는 소비자를 만족시키는 혁신에 있다. 정치인과 관료는 더 많은 권력 또는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더 높은 지위를 추구하지만 진정한 기업가는 자신의 위상과 보수를 높일 수 있는 더 많은 혁신을 추구한다.

과거 국가자본주의 시대에 한전이 국가를 필요로 했던 것은 민간 금융자본의 부족으로 기업의 성장을 위한 금융자본을 시장에서 구하기 어려웠기 때문임은 한전의 역사에서 알 수 있다. 그
러나 이제 민간 금융자본이 풍부해진 시대에 한전이 여전히 국가에 예속돼 있는 것은 시대착오적으로 여겨진다. 무엇보다도 탈탄소화, 분산화, 디지털화라는 전력생태계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등장하고 있는 시점에 구시대의 전력산업구조를 전제로 한 국가의 개입은 전력생태계의 진화를 가로막는 장애물에 지나지 않는다. 지난 20세기 국가자본주의를 통한 전력산업 발전을 이끌어낸 것에 도취된 전력당국 관료들에게는 21세기 전력산업의 미래를 그려낼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비록 전기의 공공성을 인정하더라도, 전기를 공공재로 규율해 국가 또는 국영기업이 전력산업을 도맡아야 한다는 논리는 이제 유효하지 않다. 과거 마찬가지로 공공의 영역에 있었던 정보통신산업계에서 정보통신서비스를 공공재로 규율해야 한다는 시각이 사라져버린 것처럼 말이다. 전기의 가치가 수요와 공급에 결정되는 전형적인 경제적 재화라는 명백한 사실이 전기의 공공성을 압도한다.

또한 다방면에서 너무나도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는 전력산업의 첨단기술들은 전기수급의 비탄력성을 획기적으로 개선시킬 것이고, 그럴수록 전기는 한층 더 사유재로 인식될 것이다. 그렇다면 한전이 국가의 속박에서 탈출하는 것이 전력생태계의 지속가능한 미래를 생각할 때 필연적 숙명이라는 것을 받아 들여야 할 것이다. 이것이 전력산업의 대탈출(Exodus)을 꿈꾸며 다가오는 전력생태계의 새로운 미래를 창조하기 위해 전력생태계의 거버넌스를 새로이 구축하는 작업이 긴요한 이유다.

박진표 법무법인(유한)태평양 변호사 keaj@k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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