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고도(古都) 기행
중국 고도(古都) 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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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6.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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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교수 김경호
역사의 도시 시안 ( 西安 )
정치의 도시 베이징 ( 北京 )



필자는 중국 역사를 연구하는 까닭에 중국 각 지역의 도시를 방문할 기회가 비교적 많 은 편이다 . 오늘날 중국의 정치와 경제의 현 주소를 보여주는 도시 베이징과 상하이(上 海), 천 년 역사의 도시 시안, 따스한 바람에 사람들을 취하게 만드는(林升 , 「題臨安邸」, “暖風熏得游人醉”) 도시 항저우(杭州), “오로지 인재는 초 지역에 있다(惟楚有才)”고 했을 정도로 자부심이 강한 창사(長沙) 등은 각 지역의 중요 도시들이다 . 우선 오늘날 중국의 고도성장과 접한 베이징과 상하이·광저우(廣州)를 비롯한 역사 문화도시인 시안(西安)·정저우(鄭州)·뤄양(洛陽) 등과 해변의 좋은 풍광을 벗삼은 웨 이하이(威海)·칭다오(靑島) 등 다양한 성격의 도시들이 즐비하다 . 다양한 개성을 갖고 있는 도시들은 화려함을 뽐내기도 하지만 회색 잿빛과 같은 그림 자가 드리우는 어두운 이면도 동시에 갖고 있다 . 개인의 삶에 화려함과 어두움의 성쇠 (盛衰)가 있듯이 도시 역시 마찬가지이다 .


1992년 중국과의 국교 성립 이후, 필자가 가장 가보고 싶었 던 도시가 바로 시안과 베이징이었다 . 왜냐하면 이 두 도시 는 중국의 과거와 현재를 가장 잘 보여주는 도시이기 때문 이다 . 13개 왕조의 수도던 시안과 1949년 이후 중국의 지 속적인 성장과 발전의 중심지인 현재의 수도 베이징은 중국 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사회를 이해하는 관문(關門)이라 해 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 먼저 오늘날 산시(陝西)성의 성도인 시안을 방문하여 보자 . 일부 독자들은 ‘시안’이라는 지명보다는 ‘창안(長安)’이라는 지명이 더 익숙할지도 모른다 . 왜냐하면 오늘날 중국의 원형 을 만든 한(漢) 나라와 찬란했던 당(唐)나라의 수도로서 동 서 문명의 중심지던 창안의 모습이 먼저 떠오르기 때문일 것이다 . 창안의 의미는 ‘오랫동안 평안한’ 도시가 되기를 염 원하는 바람에서 명명된 것이고, 시안은 명(明)나라 때 서북 지방을 안정시킨다는 의미에서 명명한 것이다 . 센양(咸陽) 공항에 도착하여 위수(渭水) 부근에 조된 한 나라 황제들의 릉(이집트 피라미드처럼 방대하다)을 지나면 시안의 중심부에 들어서게 된다 . 하지만 과거의 화려함은 물 론이고 한·당 시기의 화려한 창안의 위용은 쉽사리 발견할 수 없다 . 904년 당의 마지막 황제인 소종(昭宗)은 무너져가 는 제국을 뒤로 한 채 수도를 뤄양(洛陽)으로 옮긴 후, 시안 은 무참히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 현재 볼 수 있는 내성의 성 벽도 명나라 때 증축한 것이다 . 현재의 시안에서 과거의 화려한 창안을 상상할 수 있는 곳 은 대체로 시내 중심에 위치한 종루(鐘樓)와 시안 중심부를 둘러싸고 있는 성벽, 그리고 대안탑(大雁塔)이다 . 종루에 오 르면 동서남북 사통팔달의 중심지역처럼 오늘날 시안의 활 기찬 모습을 보면서 과거 동서 실크로드의 중심지인 창안 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 또한 남문 성벽을 바라보며 오른 쪽에 위치한 이슬람 사원인 청진사(淸眞寺)와 현장(玄獎) 이 인도에서 가져온 불경을 보관한 서남쪽에 위치한 대안탑 을 바라보면 창안은 동·서간의 무역뿐만 아니라 사상과 종 교를 통한 이념과 문화가 왕래한 국제도시임을 실감할 수 있 을 것이다 . 시안의 기행은 상기한 시내는 물론이고 진시황이 중국 역사 최초로 통일한 배경을 이해할 수 있는 진시황릉과 병마용 갱 그리고 당 현종과 양귀비가 사랑을 속삭던 장소이자 중국 현대사에서 중요한 사건인 ‘시안사변’이 발발한 화청지


(華淸池) 중심의 동쪽 기행과, 당 고종과 측천무후를 합장 한 건릉(乾陵 ; 측천무후릉으로 더 알려짐)과 이민족 흉노 와의 전쟁에서 커다란 공훈을 세운 한 무제의 무릉(茂陵) 을 중심으로 형성된 서쪽 기행의 세 부분 으로 크게 구분할 수 있다. 시안에서 볼 수 있는 창안의 역사는 진·한 과 당나라의 역사로 나누어서 볼 수 있다 . 진과 한나라의 창안은 분열된 제국을 하나 로 통일하고 오늘날 중국의 초석을 만든 도 시라면 당나라의 창안은 서역의 문화를 받 아들여 개방적 성격의 국제도시의 면모를 갖춘 것이 가장 두 드러진 특색이다 . 서역의 문화는 물론이고 신라의 승려인 원 측이나 혜초가 바로 창안에 머물면서 불교를 공부했으며 최 치원은 당의 관료까지 지내기도 한 것이다 . 이처럼 당의 창 안은 다른 문화를 수용하고 공존하면서 찬란한 당의 문화 를 꽃 피우게 된다 . 시안(창안)이 천년의 고도로서 위용을 간직하고 있다면 현재 중국을 대표하는 도시는 수도인 베이징이다 . 베이징은 역사와 정치의 도시이다 . 즉 명·청나라의 위용을 자랑하는 자금성(紫禁城)을 비롯한 다양한 역사문물과 오늘날 정치 권력의 핵심부가 위치한 곳이다 . 베이징은 두 가지의 커다란 특징을 가진 도 시이다. 하나는 천안문(天安門)·전문(前 門) 등과 같은 “무슨무슨 문(門)”이 많으며, 또 다른 특징은 데칼코마니처럼 베이징 지 도의 반을 접으면 왼쪽과 오른쪽이 대칭되 는 점이다 . 베이징은 남쪽의 천단(天壇)을 기점으로 일직선으로 북쪽의 천안문 광장을 지나 자금성을 통과한 후, 정북쪽에 위치한 종루(鍾樓)와 고루(鼓樓)를 관 통하는 이른바 ‘중추선(中樞線)’을 중심으로 좌우 대칭으로 건설된 도시이다 . 그 도시의 원형은 『주례(周禮)』 「고공기(考工記)」에 “사방이 9리이고 네 변의 성벽위에 각각 3개의 성문을 둔다(方九里, 旁三門)” 라는 도성 건설의 원칙에 따라 건설된 도시이다 .


러한 원칙에 의해 건설된 도시의 심장부에 위치한 것이 바로 자금성이다 . 자금성의 ‘자(紫)’는 북극성을 중심으로 별자리들이 모여 있 는 ‘자미원(紫微垣)’에서 유래한 말이다 . 즉 이곳은 천제(天 帝)가 살고 있는 곳으로 인간 세계를 지배하는 천자(天子)가 거주하는 곳 역시 자미원과 연계를 맺고 있다는 의미에서 궁궐의 이름에 ‘자(紫)’를 붙인 것이다 . 따라서 ‘천자’인 황제가 거주하는 곳은 일반 서민들이 함부 로 출입할 수 없기 때문에 ‘금(禁)’자를 붙여 ‘자금성’이라 명 명한 것이다 . 베이징 시내와 주변지역에서 명·청시기 역사의 흔적을 체험 할 수 있는 곳은 자금성외에도 하늘의 신에게 제사를 지낸 천단(天壇)과 만리장성, 명13릉(陵) 등 다양한 역사 유적지 를 찾아 볼 수 있다 .  그렇지만 또 다른 베이징의 매력을 보여 주는 곳은 자금성 북쪽에 위치한 경산(景山)공원과 북해공 원 뒤편에 위치한 후해(後海)와 십찰해(什刹海) 주변 지역이 다 . 사방이 성벽으로 둘러싸인 시안과는 달리 베이징의 특 징은 도시 가운데에 호수가 있다는 점이다 . 물이 귀한 북방 에서는 매우 이례적인 현상이다 . 이른바 ‘남수북조(南水北
調)’ 라는 수로 공사의 종착점이 바로 수도인 베이징이다 . 베이징의 호수는 크고 작은 6개의 호수로 이루어져있는데 자금성 안에 있는 호수는 전해(前海)라고 하며 밖에 위치한 호수는 후해라고 부른다 . 두 호수의 구분은 은정교(銀錠橋) 라는 다리로 구분된다 . 이 주변 지역은 자금성이나 만리장 성 등에서 느끼는 중국의 웅장함이 아닌 다정스러운 소박 한 도시의 뒷 정취를 느끼게 한다 . 북해(北海)공원 건너편에 위치한 유음가(柳陰街)에서 버드나무가 축축 늘어진 후통 (胡同 ; 서민들이 사는 뒷 골목)의 그늘을 밟으면서 베이징 시민의 삶을 엿보고 십찰해의 옆길에서 호수 바람을 맞으면 서 산책하는 도시의 낭만을 느낄 수 있는 것은 베이징 여행 의 또 다른 기쁨이다 . 여기서 잠깐! 뭐니해도 여행은 볼거리 못지않게 먹거리 역시 중요하다. 베이징에서는 이과두주(二鍋頭酒)를 마시고 양 꼬치와 북경자장면을 먹으면서 경극(京劇) 감상이 제격이 라면, 시안에서는 서봉주(西鳳酒)의 향에 취하고 파오모(泡 饃 ; 찐빵이나 전을 뜨거운 물에 넣어서 먹는 것)를 먹으며 진강(秦腔 ; 서북지역의 지방극)의 공연을 감상한다면 여러 분은 진정으로 두 도시의 낭만을 즐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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