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사(書寫)의 발전, 지하(地下)의 텍스트에서 지상(紙上)의 텍스트로
서사(書寫)의 발전, 지하(地下)의 텍스트에서 지상(紙上)의 텍스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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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6.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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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호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교수

오늘날 현대인들은 일상을 시작할 때 자연스럽게 컴퓨터를 켜고 모니터에 자신들이 쓰고자 하는 내용을 자판을 이용해 ‘입력’하고 이를 다른 사람들에게 보내 상호간의 의사를 주고 받는다. 우문(愚問)이지만 종이 위에 다양한 펜으로 글씨를 쓰기 이전에는 어디에 기록했을까? 이런 단순한 질문을 하면서 떠오르는 것은 종이의 사용 이전과 이후로 인류 역사는 커다란 변화를 맞이하였다는 점이다. 종이에 자신들의 의사를 상대방에게 전달하기 이전에는 어떤 방법을 사용했을까? 신체의 일부를 이용한 바디 랭귀지, 상호 약속된 소리와 언어 그리고 문자 등일 것이다. 이 가운데 기록으로 남는 문자는 인간들만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문화이다. 인간들은 종이 발명 이전에 다양한 재료에 문자를 기록하고 이를 통해 자신들의 역사를 만들었던 것이다. 종이가 발명되기 이전의 재료는 나무, 돌, 토기 파편, 거북이나 동물뼈, 대나무, 양의 껍질로 만든 양피지(parchment) 등이다. 이러한 재료들이 문자를 기록하는 데 사용되었다는 증거는 동·서양 모두에서 확인된다. 예를 들면, 1799년 나폴레옹이 이끄는 이집트 원정대의 장교인 피에르 부샤르(Pierre Francois Xavier Bouchard)가 나일 강 하류 로제타 지역에서 작업을 하다가 발견한 ‘로제타석’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 비석에 대한 연구 결과, 기원전 196년의 프톨레마이오스(Ptolemaios, Klaudios) 5세를 기념한 포고(布告)의 대역(對譯)을, 상단에 이집트 성각문자(聖刻文字; 히에로글리프Hieroglyphe, 돌에 새긴 신성한 문자), 중단에 이집트 민중문자(데모틱 demotic,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가로로 쓴다), 하단에 그리스문자로 새긴 것을 밝혀냈다. 로제타석의 발견으로부터 정확히 100년이 지난 1899년, 이집트에서 멀리 떨어진 중국에서도 미지(未知)의 고대 문자가 발견되었다. 바로 하남성 안양시에서 발견된 ‘갑골문(甲骨文)’ 이다.



                                                           갑골문자


갑골문의 발견은 실제로 존재했다는 것이 의문시되었던 중국고대의 은왕조가 거북이 등뼈와 짐승 뼈에 새겨진 3천 수백 년 전의 문자 해독으로 인해 밝혀지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또한 고대 이집트인들이 사용했고, 그리스 로마제국에서 널리 사용된 ‘파피루스(papyrus)’ 종이나 고대 중국에서 사용된 청동기에 새긴 명문[금문(金文)이라칭함], 대나무와 나무를 쪼개 사용한 죽간(竹簡)과 목간(木簡), 그리고 비단을 소재로 한 백서(帛書) 등이 종이 발명 이전에 사용된 대표적인 서사 재료이다. 그렇다면 우리와 친숙한 문자인 한자는 언제 만들어져 어떤 서사재료를 사용했을까? 『역경(易經)』 <계사전(繫辭傳)>에는 “상고 시대에는 매듭을 지어 다스렸는데 후세에 성인이 그것을 서계(書契; 은나라 때 대나무나 거북이 등뼈 등에 새긴문자)로 바꾸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와 관련하여 후한 시대 허신(許愼)이 지은 『설문해자(說文解字)』에는 창힐(蒼?)이 새와 짐승의 발자국을 보고 문자를 만들었으며, 문자를 만들 때 형상을 본 따 만들고[문(文)], 여기에 소리를 더하였으며[자(字)] 이를 근거로 죽간과 백서에 쓴 것이 ‘서(書)’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에 근거하면 문자의 창조는 사실상 간단한 부호에서 비롯된 상형문자이다. 초기의 상형문자는 사물의 형체를 본떠 일정한 의미를 표시하였지만 완전한 의미에서 문자라고 할 수 없다. 즉 상형적 요소가 줄어들고 일정한 규칙하에서 정형화되고 규범화된 문자로 발전한것이 바로 ‘갑골문’ 이다. 주대(周代)에는 갑골문보다 많은 문자 수를 기록할 수 있는 금문이 사용되었다. 이러한 발전 추세는 춘추전국시대로 이어져 죽간과 목간 등과 같은 다양한 서사 재료의 사용에 의한 문자보급이 확대되었고, 유가(儒家)·도가(道家)·법가(法家) 등의 사상 성립의 기초가 되었다. 동시에 죽간으로 만들어진 서적의 출현과 국가 통치의 중심인 법률문서의 작성과 같은 문서행정의 발전은 고대 국가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으로 작용하였다.



            목간(복제품)                                   목간행정문서(복제품)


이와 같은 ‘지하(地下)’의 텍스트가 ‘지상(紙上)’의 텍스트로 대체되기 시작한 것은 후한시대 채륜(蔡倫)이 종이를 발명하면서 부터이다. 『후한서』 <채륜전>에 “비단은 귀하고 죽간은 무거워서 불편했다. 이에 채륜이 나무껍질, 마 조각, 찢어진 천, 그물로 종이를 만들었다. 원흥 원년(105년) 황제에게 아뢰니 황제가 좋다고 하였다. 이로부터 종이를 쓰지 않는 자가 없었고 세상 사람들이 이것을 채후지(蔡侯紙)라고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후한시대 후기 이후에는 종이의 지위는 높아지고 보편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여 당시 제지 기술자인 좌백(左伯)이 만든 종이는 매끄럽고 흰 백색이어서 당시의 문인들은 그가 만든 종이를 소유하는 것이 커다란영광이었다고 한다. 그 결과 3세기에 접어들어서는 “낙양지 귀(洛陽紙貴 ; 낙양지역에 종이의 가격이 올랐다)”일 정도로 종이는 중요한 필기재료였으며, 403년 환현(桓玄)은 모든 공문에 죽간의 사용을 금지시키고 종이를 사용할 것을 명령할정도로 이른바 ‘지사본(紙寫本)’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즉, 사회적 수요의 증가에 따라 종이의 사용은 증가하였고 곳곳에 책방이 열리게 되었다. 더욱이 10세기 송대(宋代) 사회이후 본격적으로 제지술과 인쇄본이 발달되기 시작하면서서적은 본격적으로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사회에서 유통되기 시작하였다.


                               사기-서적


이후 1천여 년의 기간 동안 동아시아의 역사와 문화는 종이 위에 하나하나 기록되어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 21세기, 종이는 여전히 현대인들에게 중요한 서사재료이다. 그러나 서사의 환경이 급속도로 변화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종이 대신에 컴퓨터 자판을 사용하여 글씨를 쓰지 않고 입력한다. 불과 30여 년 전 종이에 한 글자 한 글자를 고민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적어 내려가던 시절과 비교하면 1천여 년 동안 사용된 종이는 너무나도 쉽게 다음 주자에게 자신의 자리를 양보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동시에 현대인들의 첨단화된 서사매체의 사용은 혹시 너무나도 쉽게 자신들의 생각을 깊은 사색(思索)과 성찰(省察)없이 가볍게 썼다 지웠다하는 것은 아닌지?(아마도 기우(杞憂)이겠지만!) 그래서인지 요즘 만년필을 사용하는 사람들을 보기가 어렵다. ‘200자 원고지’에 한 글자 한 글자 쓰면서 묵향(墨香)은 고사하고 잉크냄새를 맡는 것도 결코 쉽지 않은 것이 우리들의 일상이다. 전자매체를 빈번히 사용하는 요즘, 문득 종이와 펜이 그리워지는 것은 ‘경쟁’과 ‘평가’에 의해 하루하루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지나친 호사(豪奢)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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