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좋아하세요?] “미치지 마라…왕은 내내 견디는 자다”
[뮤지컬, 좋아하세요?] “미치지 마라…왕은 내내 견디는 자다”
  • 이승희 기자
  • 승인 2021.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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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돋보기 - 세자전 편
사진=음악극 ‘세자전’ 유튜브 하이라이트 영상 캡처
사진=음악극 ‘세자전’ 유튜브 하이라이트 영상 캡처

음악극 ‘세자전’은 동명의 다음 웹툰 ‘세자전’을 원작으로 한 작품이다. 음악극은 음악적으로 양식화된 연극을 말한다. 오늘날에는 주로 뮤지컬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으나 원래 음악극은 연극과 음악, 그리고 무용이 밀접하게 결합된 연주 형태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넓은 의미로는 오페라, 오페레타, 발레, 뮤지컬, 레뷰 등을 포괄적으로 이르는 말로 볼 수 있으며 나아가 한국의 판소리나 개화기 이후의 창극 등도 음악극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다. 뮤지컬이 넘버, 즉 음악이 주를 이루는 장르라면 음악극은 뮤지컬보다는 연극에 가깝다. 음악이 곁들여진 연극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지난해 11월 처음 극을 올린 ‘세자전’은 초연임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잘 만들어진 ‘웰메이드’ 작품이다. 동생을 죽이고 옥좌에 오른 왕 이홍이 자신의 자리를 물려줄 세자를 경연으로 뽑겠다고 결정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경연을 통해 대군들의 능력을 검증한 뒤 가장 우수한 사람을 세자로 삼겠다니. 얼핏 들으면 퍽 합리적이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이홍이 동생을 죽이고 왕이 됐다는 사실이다. 세자였던 동생을 죽이고 피로 물든 옥좌를 차지한 만큼 사랑하는 자식들은 피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길 바랐을 것이다. 이홍의 “내 너희의 손에 다시는 피를 묻히지 않으리라”는 말도 진정성이 느껴진다. 그러나 애초에 역리로 왕좌에 오른 사람이 정도를 알고 있었을 리가. 첫 단추를 잘못 끼운 왕이 내뱉는 말들은 순리에 어긋날 수밖에 없었던 것 아닐까. 적어도 원래 세자여야 했던 중전의 아들 안영대군에게는 청천벽력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홍의 원래 의도가 무엇이었든 이야기는 시작부터 파국이다. 아버지를 죽일 것이라는 신탁을 피해 도망친 오이디푸스가 결국 운명의 소용돌이에 휩싸인 것처럼, ‘세자전’의 모두가 비극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세자전’은 굉장히 효과적으로 각 인물의 입장을 대변한다. “뜨거움이 식어야만 차가움도 생겨나는 법”이라며 대군들의 치기를 애정 어린 눈으로 보던 이홍의 아비로서의 면모, 형제들의 긴장을 완화하고 마지막엔 희생하는 완덕군, 평생 가라는 대로만 걸었더니 저승길도 찾지 못하겠다는 안영대군까지. 우는 형제를 위해 답을 찾고 매달리고 절규하는 동진군은 또 어떤가.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는 인물이다. ‘세자전’은 그 어떤 인물도 허투루 소모하지 않는다. 인물 모두가 서사를 완벽하게 갖추고 있다. 그런 인물들의 정의와 목표가 클라이맥스에서 부딪히며 파국이 펼쳐지니 관객으로서는 스토리에 빨려 들어갈 수밖에.

이는 ‘세자전’에 악역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으로 연결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인물 모두가 서사를 제대로 갖추고 있기에 가능한 지점이다. 사실 ‘세자전’에서 모든 일의 흑막은 중전이다. 주인공인 진평군과 가장 대립각을 세우는 인물인 만큼 스토리상으론 악역이나 다름없다. 이홍을 왕에 올리고 아들인 안영대군을 세자에 올리기 위해 중전이 얼마나 많은 피를 묻혔는지 관객들은 안다. 그런데 이상하다. 중전을 무작정 손가락질하기가 영 꺼림칙하다. 중전이 보여준 일련의 서사가 관객의 마음을 움직였으며 끝까지 악독한 모습은 캐릭터의 일관성을 위한 묘사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시대가 바뀌었다. 주인공과 대척점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관객은 무작정 욕하지 않는다. ‘세자전’이 가지고 있는 매력적인 지점이 바로 이 부분이다. 관객이 모든 인물을 이해하고 모두를 안타깝게 여긴다는 것.

특히 이홍과 중전의 관계는 꽤 흥미롭다. 이홍과 중전은 속된 말로 ‘혐관’(혐오+관계를 뜻하는 말. 서로 싫어하는 관계를 뜻하는 커뮤니티 용어)이다. 동생의 악몽에 시달리는 이홍은 아들을 세자로 만들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중전이 끔찍하다. 중전이라고 뭐 다를까. 자신의 가문 덕에 왕위에 오른 주제에 별안간 세자경연을 열고 자기 아들을 푸대접하는 왕이 고울 리가 없다. 그렇기에 이홍이 중전의 칼에 일부러 찔려준 뒤 중전의 뺨을 쓰다듬는 모습은 충격적이다. “그대를 살릴 명분이 내겐 없구나.” 그 목소리에 담긴 비통함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악행을 멈추지 못하는 중전을 제 손으로 처단해야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중전을 살리고 싶었던 이홍의 마음이 전해진다. 왕과 중전이기 이전에 부부였던 거다. 이어지는 왕과 중전의 회상은 이를 뒷받침한다. 관객은 왕과 중전의 에피소드를 역순으로 보게 된다. 그 끝에서 중전은 앳된 목소리로 수줍어하며 이홍에게 말한다. “지안. 지안입니다.” 모략을 일삼던 중전은 없다. 이홍을 보며 수줍어하던 아가씨 지안만이 남아있을 뿐. 오셀로와 데스데모나 부인 같았던 그들의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처음엔 사랑이 있었더라는 슬픈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왕좌가 만들어낸 비극의 일부다.

물론 비극은 예견되어 있었다. 예상 가능한 범주의 일이다. 무대 위에 놓여있는 기울어진 왕좌만 봐도 알 수 있다. 순리를 거스른 이홍이 잘못된 왕이라는 것을 표현함과 동시에 그들의 이야기도 걷잡을 수 없는 비극의 내리막으로 치달을 것이라는 암시다. 그래서일까. ‘세자전’은 관객이 이들의 비극에 보다 빨리 녹아들 수 있도록 극의 초반부 연출에 유독 신경 썼다. 무대에 크게 걸려있던 ‘세자전’ 세 글자는 극이 시작되면서 사라진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도입부를 중소형극장에서 볼 수 있으리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다. 영상이 아닌 오직 무대와 조명으로만 표현된 장면이라는 사실이 두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지 않을 정도다.

또한 ‘세자전’은 옷이라는 소재를 통해 극에 풍성함을 더했다. 무대예술이라는 연극의 한계를 옷을 통해 극복한 것이 다. 중전의 계략에 넘어가 죽은 아비를 부관참시했다는 진평의 참담함, 죽은 어머니의 옷을 들고 울부짖는 진평의 슬픔, 형제를 위한 완덕군과 동진군의 희생 등이 옷을 통해 표현된다. 배우들의 섬세한 몸짓과 우리 고유 의복인 한복의 아름다움은 덤이다.

또한 여러 번 반복되는 대사들은 대사 그 자체로 권선징악을 실현한다. 중전이 진평을 괴롭히기 위해 내뱉은 대사들이 결국 스스로를 벌주는 대사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 뿐인가. 대군들에게 왕은 견디는 자라며 미치지 말라고 했던 이홍이 나중엔 견딜 수 없다면 차라리 미쳐버리라고 하는 것만 봐도 그렇다. “어머니. 날이 찹니다. 이 옷을 걸치소서” 어미를 잃은 진평이 울부짖으며 했던 대사를 극의 후반부에서는 안영대군이 다시 내뱉는다. 대사에 담긴 감정을 이미 한번 접한 관객은 반복되는 대사에 더 깊이 공감할 수 있다. 그것은 카타르시스를 선사하기도, 때로는 지독한 비극에서 헤엄치게 만들기도 한다. 고작 100분의 시간 동안 이 많은 것을 담아낼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세자전’은 칭찬받아 마땅하다. 형제간의 우애, 자식을 아끼는 마음, 어머니의 비극에 무너지는 마음 등이 모두 표현됐다. 초연이라는 점이 믿기지 않을 정도다.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객석이 모두 채워지지 못한 상태로 공연이 진행됐다는 점이 안타깝다. 다가올 재연에서는 꽉 찬 관객석으로 배우들과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이승희 기자 aga4458@k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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