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쓸신맥] 새로운 다짐을 하는 당신을 위한, 도전을 담은 맥주들
[알쓸신맥] 새로운 다짐을 하는 당신을 위한, 도전을 담은 맥주들
  • 윤한샘
  • 승인 2024.01.2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살아온 세월과 상관없이 새해라는 단어는 언제나 마음을 설레게 한다. 새로운 시작을 다짐하는 1월은 희망을 노래하는 달이다. 많은 이들이 힘들었던 일을 툭툭 털며 손때 묻지 않은 다이어리에 그럴듯한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다이어리 속 희망은 조금씩 빛이 바랜다. 계획과 실행은 화성에서 온 여자와 금성에서 온 남자처럼 다른 존재가 되고 만다. 너무 자책할 필요는 없다. 변화를 거부하는 태도는 수만 년간 안정을 추구해 온 우리 뇌의 진화적 산물이니까. 뇌는 항상성을 좋아한다. ‘일신우일신’은 괴롭다. 싫어하는 일을 억지로 하며 달라진 환경과 조건에 적응하는 건 지구상 모든 생물이 싫어하는 일이다.

그러나 변화하지 않는 삶은 울림이 없다. 가치 없는 인생을 살고픈 사람은 없을 것이다. 조그만 성취가 모여 큰 성과를 이루는 법, 원래 모든 일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작은 발걸음이 모여 많은 발자국을 만든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은 우리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평온한 것처럼 보이는 맥주 세계에도 도전으로 세상을 흔들고 가치를 빛낸 맥주들이 있다. 새해 결심이 희미해질 때쯤 여기 소개하는 맥주를 한번 마셔보면 어떨까? 또 아는가. 변화와 도전을 품은 맥주를 만난다면 작심삼일을 조금이나마 줄일 수 있을지.

최초의 황금색 라거, 필스너 우르켈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맥주의 색을 묻는다면 90% 이상 황금색을 떠올릴 것이다. 어이없는 질문이라고 생각하겠지만 1842년 이전까지 맥주 세계에 황금색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대부분 맥주는 어두운색이었고 그나마 밝은색이라 불리던 맥주도 갈색에 가까웠다.

1842년 체코의 작은 마을, 필젠에서 태어난 황금색 라거, 필스너 우르켈은 혁신에 대한 갈망과 도전의 결과물이다. 원래 필젠의 맥주는 형편없었다. 맥주 맛이 얼마나 지독했는지 1838년 시민들이 몰려나와 모든 맥주를 시내 광장 하수구에 버리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때 버린 양이 36배럴, 지금으로 치면 무려 1만 3,000병이었다.

필젠 시장은 곧바로 도시를 대표하는 새로운 맥주를 위한 계획을 세웠다. 자존심은 사치였다. 옆 지역 바이에른에서 양조사로 이름을 날리던 요셉 그롤을 영입하고 전폭적인 투자를 약속했다. 요셉 그롤은 당대 맥주를 뛰어넘는 새로운 기술 트렌드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수개월간 유럽을 탐방하며 많은 맥주 혁신가를 만났다. 그가 주목한 맥주는 라거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맥주는 에일이 대세였다. 상온발효로 만들어지는 에일은 8000년 동안 인간과 동고동락했다. 반면 섭씨 10도 정도에서 발효되는 라거는 냉장시설이 발명되기 이전까지 양산하기 힘든 맥주였다. 하지만 절제된 향 뒤에 깔끔함이 도드라지는 라거는 냉장기술이 등장하면서 대세 맥주가 될 잠재성을 갖고 있었다. 요셉 그롤은 미래가 요원했던 라거에 승부를 걸기로 했다.

1842년 요셉 그롤은 어렵사리 가져온 라거 효모를 필젠의 새로운 맥주에 적용했다. 그리고 밝은 맥아를 이용해 어두운 맥주에서 과감하게 탈피했다. 그 결과, 최초의 황금색 맥주이자 모든 황금색 라거의 원조, 필스너 우르켈이 탄생했다. 필스너는 필젠의 맥주를, 우르켈은 오리지널을 의미한다.

낡은 것을 개혁하고 새로운 것에 도전했던 필스너 우르켈은 맥주 세계에 혁명을 몰고 왔고, 20세기 들어 전 세계 맥주 시장을 황금색으로 물들이며 수천 년간 왕좌에 있었던 에일을 몰아냈다.

위스키와 맥주의 혁명적 만남, 버번 카운티

1988년 시카고에 터를 잡은 구스 아일랜드는 1000번째 양조를 앞두고 특별한 맥주를 고민하고 있었다. 기념비적인 맥주를 고심하던 브루마스터 그렉 홀은 우연히 참석한 위스키 모임에 서 해답을 얻었다. 곁에 있던 위스키 전문가가 버번위스키를 품었던 배럴에 맥주를 숙성시키는 게 어떠하겠냐는 아이디어를 던진 것이다.

위스키 배럴에 맥주를 숙성시키는 건 큰 도전이었다. 무엇보다 어떤 맥주가 어울릴지가 관건이었다. 배럴 안에는 여전히 높은 알코올과 향이 가득했기 때문에 평범한 맥주는 그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잃을 게 뻔했다. 강력한 위스키 향미를 견딜만한 맥주가 필요했다.

그렉의 선택은 임페리얼 스타우트였다. 임페리얼 스타우트는 알코올 도수가 높은 까만 맥주, 스타우트를 의미한다. 이 맥주라면 배럴 속에서 벌어지는 향미 투쟁에서 자신을 지킬 수 있으리라 믿었다. 수차례 도전과 실험 끝에 1992년 마침내 구스 아일랜드는 버번 카운티를 출시했다. 세계 최초의 버번위스키 배럴 숙성 맥주였다.

우주 같은 고혹적인 흑색 속에 짙은 다크 초콜릿, 갓 볶은 카카오, 섬세한 바닐라와 부드러운 오크 향, 묵직한 쓴맛과 뭉근한 단맛, 찐득한 바디감을 내뿜는 버번 카운티는 완벽한 밸런스와 복합성을 지닌, 세상 어디서도 볼 수 없는 맥주였다.

이 맥주를 접한 사람들은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곧 열광하기 시작했다. 점차 버번 카운티는 최고 권위의 맥주 대회를 석권하며 전 세계 양조사들에게 큰 영감을 전달했다. 그리고 프리미엄 크래프트 맥주의 반열에 오르며 전설이 되었다. 현재 국내 크래프트 맥주에도 심심치 않게 배럴 숙성 맥주를 맛볼 수 있다.

도전은 생각처럼 쉽지 않다. 삶의 항상성을 깨고 욱신거리는 아픔을 견뎌야 한다. 상처에 돋는 새살을 당연하게 바라볼 때, 비로소 목적한 바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 결과물은 그 어떤 것보다 달콤하지만 건강하다. 새해 목표를 향해 달리다 힘이 부치면 잠시 내려놓고 좋아하는 맥주 한잔을 해보자. 그때 맥주는 다친 마음과 몸을 보듬어주는 멋진 치료제가 될 것이다. 2024년 당신을 위해, 치어스!

윤한샘 한국맥주문화협회장 keaj@kea.k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