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좋아하세요?] “다른 날은 없어. 오직 오늘 뿐”…오늘을 빌려 살아가는 사람들
[뮤지컬, 좋아하세요?] “다른 날은 없어. 오직 오늘 뿐”…오늘을 빌려 살아가는 사람들
  • 이승희 기자
  • 승인 2024.02.2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뮤지컬 ‘렌트’

뮤지컬 ‘렌트’는 푸치니의 오페라 라보엠을 현대화한 록 뮤지컬이다. 주인공들은 뉴욕 이스트 빌리지에 사는 가난한 예술가들로 에이즈나 마약중독 등에 걸려있으며 동성애자도 대다수다. 꽤 파격적인 소재지만 관객은 첫 장면부터 극에 홀린 듯이 몰입하게 된다.

대부분의 뮤지컬은 곡을 연주하는 세션과 음악감독이 무대 아래 마련된 공간, 즉 관객의 시야에 보이지 않는 곳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렌트는 세션이 무대 왼쪽을 차지하고 있어 극이 시작되기 전부터 관객은 무대에 자연스레 녹아들게 된다. 또한 일반적으로는 공연 중 안내사항을 방송한 뒤 암전 후 무대가 시작된다. 그러나 렌트는 다르다. 주인공인 로저가 무대에 등장해 기타를 조율하고 다른 배우들도 하나둘 무대에 등장한다. 암전은 생각보다 느리게 찾아오고 관객은 공연이 시작된 것이 맞는지 몰라 당황하게 된다.

하지만 그 당황은 곧 짜릿함으로 바뀐다. 배우들이 자신들의 얘기를 동시다발적으로 꺼내고 각자의 자리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걸 보며 어느새 관객은 이스트빌리지에 사는 또 한 명의 예술가가 되어 있는 것이다. 몰입한 관객은 신이 난 나머지 첫 번째 넘버의 가사가 얼마나 절박하고 처절한지 쉽게 알아차릴 수 없다. 첫 번째 넘버인 ‘RENT’는 집세가 없어서 쫓겨날 위기에 처한 작곡가 로저와 그의 룸메이트인 다큐 감독 마크를 필두로 모두가 집세를 낼 수 없다고 외치며 시작된다.

“어떻게 다큐를 찍나. 현실이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데.  먹고살기 빡센데 집세 못 내면 쫓겨날 신세. X라 춥고 배고파. 갚을 수가 없어. 뭘 어떻게 갚아. 집세를.”

겨울의 추위보다 더 냉혹한 현실에 살고 있는 이들은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결국 집세를 갚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카메라를 들어. 기타도 써. 쎈 척 해봐. 맞서줄게. 갚지 않을 거야. 작년 거. 올해 거. 내년 거. 집세 안 낼 거야. 세상 모든 건 다 빌려 쓰는 거니까.”

얼핏 들으면 집세도 내지 않고 무슨 세입자들이 이리 당당한가 싶기도 하다. 그러나 마지막에 나온 가사는 이 극의 전체를 관통하는 아주 중요한 메시지다. 세상 모든 건 빌려 쓴다는 것. 우리는 살면서 많은 것들을 소유하게 되지만, 사실 그것은 소유했다는 착각일지 모른다. 실제로 사람은 죽고 난 뒤 그 어떤 것도 가지고 갈 수 없으니 진정한 의미에서 소유한 것은 아무 것도 없지 않을까? 렌트는 그 지점을 건드리며 말한다. 우정도, 사랑도, 살아 숨 쉬는 매일도 어디선가 빌려온 것이라고. 그러니 빌려서 쓰고 있는 이 순간만큼은 후회 없이 충실하자고.

그러나 마음을 온전히 열고 그들의 삶을 ‘답습’하기엔 심리적 거부감이 남아있다. 동성애도 에이즈도 마약도 모두 별나라 이야기 같기만 하다. 완전히 빠져들기엔 그들이 짊어진 삶과 현실의 무게가 너무 무겁다고 생각하는 관객. 그리고 그런 관객은 주인공 로저와 닮아있다.

사진=로저 장지후(신시컴퍼니 제공)
사진=로저 장지후(신시컴퍼니 제공)

로저는 2년 전 에이즈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여자친구 에이프릴이 자살한 뒤로 단 한 곡의 노래도 만들지 못하고 있다. 늘 찬란한 노래를 찾겠다고 말하지만 현실은 가사 한 줄 쓰지 못하고 집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는 신세. 여자친구가 죽었던 과거에 혼자만 머물러 있는 셈이다. 그렇게 집에 혼자 남 겨진 로저가 부르는 ‘One Song Glory’에는 그의 숨겨둔 진심이 녹아있다.

“난 다시 숨을 쉬고 싶어, 영원히 타오르는 그 불꽃처럼. 날 죽음이 데려가기 전에 텅 빈 나의 삶을, 나를 구원해 줄 노래를 찾아. 시간은 무심히 흘러가고 죽어가.”

로저는 결국 살기 위해 노래를 만들려고 한다. 에이즈에 걸린 무력감이 삶을 잠식하기 전에 무언가가 자신의 인생을 채우기를, 누군가 구원해 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그런 로저의 바람을 듣기라도 한 듯 같은 건물에 살던 미미가 양초를 빌리러 온다. 그 순간 둘은 첫눈에 반한다.

그러나 로저는 자신의 마음을 외면한다. 사랑 때문에 지독한 상처를 받았기에 새로운 사랑을 본능적으로 거부한 것이다. 이는 상처받고 싶지 않아서 상처주는 우리네의 모습과 크게 다를 바 없다. 그렇지만 뮤지컬 ‘렌트’는 포기하지 않는다. 로저의 친구들과 미미를 통해 끊임없이 로저의 닫힌 마음을 두드린다. 로저를 만나러 온 미미와 앙상블들이 부르는 노래 ‘Another Day’의 가사가 그렇다.

“지금 여기 지금 우리. 두려워하지 마. 삶을 놓치지 마. 지금 여기 이 순간뿐. 또 다른 길 내일은 없어. 오직 오늘뿐.”

렌트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하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꼽으라면 단언컨대 이 문장을 꼽을 수 있을 거다. 넘버가 진행되는 동안 여러 번에 걸쳐 반복되던 ‘오직 오늘뿐’이라는 가사는 굳게 닫 혔던 로저의 마음에 균열을 내고, 조금씩 열리기 시작한 마음은 걷잡을 수 없게 된다. 미미를 쫓아내고 곡 작업에 몰두하던 로저는 끝내 음악을 완성하지 못하고 미미가 나가버린 현관 쪽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그러다 스스로 머리를 때리며 자책하기도 한다. 결국 로저는 매일 갇혀있던 좁은 책상, 심지어 다른 배우들과 앙상블이 무대를 휘젓고 다닐 때도 꿋꿋이 지키고 있던 무대 위 책상을 떠나 밖으로 나간다. 그리고 그 순간 관객이 느끼는 희열도 커진다. 사랑 때문에 세상과 단절한 사람이 결국 사랑 때문에 다시 세상 속으로 자신을 내던진다니 응원할 수밖에 없다. 그 사랑이 다시 그에게 상처를 주게 될지라도 괜찮다. 기꺼이 절망을 받아들이기로 한 마음 자체가 희망의 씨앗이다.

사진=뮤지컬 렌트(신시컴퍼니 제공)
사진=뮤지컬 렌트(신시컴퍼니 제공)

뮤지컬 ‘렌트’가 가진 가장 큰 힘은 공감과 갈망에서 온다. 우리가 언젠가 가지고 있었을, 그러나 녹록지 않은 현실 때문에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그럼에도 늘 갖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 바로 ‘자유로움’이다. 렌트는 자유에 대한 갈망을 건드리는 극이다.

무대 위에서 가난한 예술가들이 뛰어노는 모습에 관객이 스스럼없이 녹아들고, 그들과 함께 노래를 흥얼거리게 되는 지점. 인물들이 서로 부딪히고, 욕하고, 때로는 격렬하게 몸싸움 할지라도 그 모든 게 자유로운 청춘이기에 그런 것이라 관객이 납득하는 지점. 마약도, 동성애도, 에이즈도 나와는 상관없는 세계지만 그럼에도 당당한 저들이 신기하고 또 응원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는 지점. 그러한 지점들이 모여 이토록이나 자극적인 작품에 진정성이 생기는 것이다. 렌트가 지닌 진정성은 결국 지금 청춘인 사람, 청춘을 가져본 적 있던 사람, 청춘을 놓쳐버린 사람, 삶을 열정적으로 대하지 못했던 사람, 그들 모두에게 강한 울림을 준다.

로저의 친구인 콜린의 연인이자 드러머인 엔젤의 대표 넘버 ‘Today 4 U’의 가사 중 “Today for you. Tomorrow for me. 당신에게 다 드릴게요.”라는 말이 나온다. 렌트에서 항상 강조하고 가장 중요하다고 언급되는 ‘오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준다는 의미다. 엔젤은 알고 있었을까? 하루가 지나면 ‘내일’은 다시 ‘오늘’이 된다는 것을 말이다. 결국 나의 모든 오늘을, 남은 모든 생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선물한다는 말이다. 세상에 이토록 달콤한 고백은 없을 터. 동성애라는 이유만으로 비난하기엔 이들의 사랑이 너무 아름답다.

에이즈로 인해 세상을 떠난 엔젤을 기리며 콜린은 말한다.

“사랑은 절대 살 수 없다 하지만 서로 빌릴 수 있어. 돌려줄 필요 없어.”

오직 오늘뿐인 이 순간을 소중히 여길 것. 내일을 바라보며 지금을 흘려보내지 말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진심을 다할 것. 마음을 돌려받기 위해 전전긍긍하지 말고 스스로의 감정에 충실할 것. 아주 당연한 사실이지만 바쁜 현실에 치여 우리가 잊고 살았던 것들이다. 그리고 아주 당연하게도, 우리는 모두 처음 뿐인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사진=뮤지컬 렌트 커튼콜
사진=뮤지컬 렌트 커튼콜

 

 

 

 

 

 

 

 

 

 

오십이만 오천육백 분의 귀한 시간들. 우리들 눈앞에 놓인 수많은 날.

오십이만 오천육백 분의 귀한 시간들. 어떻게 재요 일 년의 시간.

날짜로 계절로 매일 밤 마신 커피로. 만남과 이별의 시간들로.

그 오십이만 오천육백 분의 귀한 시간들. 어떻게 재요 인생의 시간.

그것은 사랑. 사랑으로 느껴 봐요.

 

오십이만 오천육백 분의 귀한 시간들. 그 많은 시간을 어찌 살아갈까.

오십이만 오천육백 분의 수많은 날. 인생의 가치를 어찌 판단을 하나.

아팠던 진실로 뜨거운 눈물로. 스쳐간 인연들로 죽은 이유들로.

 

다 함께 노래해. 우리 삶은 계속돼.

자, 친구들과 함께한 일 년을 노래해.

기억해요 사랑. 사랑으로 느껴봐.

- Seasons of Love 中 -

 

이승희 기자 aga4458@kea.k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