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시대에서의 과학은 ‘문화’
새로운 시대에서의 과학은 ‘문화’
  • 이정모
  • 승인 2023.07.1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시인의 이름이 윤형주인지 아니면 윤동주인지 헷갈릴지언정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시집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시집 제목과 달리 윤동주는 천문과 기상 현상 대신 사람을 노래한다. 양자역학이 뭔지는 몰라도 집에 TV가 있다면 양자물리학자 김상욱 교수 이름 정도는 들어봤을 것이다. 그는 일찌감치 ‘김상욱의 양자 공부’(2017)로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살아사고 있고 곧 양자 컴퓨터라는 새로운 문물을 사용해야 하는 우리에게 그 근저에 있는 양자물리학의 역사와 개념을 심어주려 했다.

‘떨림과 울림’(2018)을 통해서는 우주 속에 있는 인간을 파악하는 방법을 보여줬다. 그는 물리학이라는 언어를 통해 우리의 삶과 죽음, 타자 그리고 세계와의 관계를 설명한다. 이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는 “우주의 본질을 본다는 것은 인간의 모든 상식과 편견을 버리는 것”이라고 말한다.

과학을 쉽게 풀어내는 책은 많다. 하지만 많은 교양과학서들이 쉬워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본질을 피해가곤 하는데 김상욱은 독자들이 본질을 맞닥뜨리게 한다. 이해하는 사람은 이해하고못하는 사람은 못한다. 괜찮다. 과학에서 “모른다”,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내가 뭘 모르는지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2016년부터 매년 책을 내던 그가 이번에는 5년만에 신간을 출판했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인간’이 바로 그것. 제목이 궁금할 것이다. 그에게 하늘은 물리법칙, 바람은 에너지 그리고 별은 물질이다. 책을 읽으면서 그가 5년 동안 얼마나 지평을 넓혔는지 실감했다. 그가 마침내 물리학의 경계를 뛰어넘었다. 물질에서 생명으로, 우주에서 인간으로 사고가 확장됐다. 작가가 뛰어넘을 때 독자도 함께 뛰어넘고, 작가가 확장될 때 독자도 확장된다.

김상욱에게 있어 물질과 생명, 우주와 인간은 각각 별개의 것이 아니다. 원자가 별이 되고, 별이 생물이 된다. 최초의 박테리아는 마침내 인류가 된다. 그의 책을 읽으면 마치 도미노가 쓰러지는것처럼 자연스럽게 경계가 허물어지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된다.

물론 그 시작점은 원자. 물리학자로서 당연한 선택이다. 원자에서 분자, 분자에서 물질, 그리고 물질에서 생명으로 층위를 올린다. 생명에서 인간으로 확장된다. “모든 것은 원자로 되어 있다”고우리가 암기하고 있던 과학의 명제를 세밀히 그려낸다.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 같다.

다른 이와 김상욱의 차이점은 이 부분에서 드러난다. 모든 것은 원자로 환원된다는 데에 그치지 않고 각 층위가 바뀔 때마다 물리학의 한계를 넘어서야 한다고 말한다. 단순히 원자가 더해져서 분자가 되고, 분자가 더해져서 물질과 생명이 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층위가 바뀔 때마다 새로운 특성이 창발(創發)한다.

책은 크게 4부로 되어 있다. 물리학에서 화학으로 화학에서 생물학으로 그리고 생물학에서 인간학으로 넘어가는데 이 과정이 단절되어 있지 않고 관통한다.

1부는 ‘원자는 어떻게 만물이 되는가’이다. 만물이 원자로 되어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원자는 어떻게 결합해서 커다른 물질을 이룰까? 우주에 존재하는 힘은 중력, 전자기력, 강한 핵력과 약한 핵력 네 가지다. 이 가운데 원자들이 주고 받을 수 있는 힘은 전자기력뿐이다(책 76쪽에 설명). 전자기력이 작용하는 방식에 따라 이온결합, 공유결합, 금속결합이 이뤄진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물리학은 생각을 하게 하는 학문이라는 걸 절감했다. 생화학을 전공한 나는 단 한 번도 왜 전자기력만이 왜 각각의 방식으로 원자들 사이에서 작용하는지 생각해 본 이 없다.

2부 ‘별은 어떻게 우리가 되는가’는 과학을 좋아하는 분이라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다. 4부 ‘느낌을 넘어 상상으로’는 정보와 문화를 물리학자의 눈으로 보는 특이한 내용이다. 저자의 생각은 어떨지 모르지만 내가 보기에 이 책의 백미는 3부 ‘생명, 우주에서 피어난 경이로운 우리’다. 생명을 바라보는 물리학자의 시선이 느껴진다. 물리학이 얼마나 아름다운 학문인지 닫게 된다.

물리학자의 눈으로 보면 생물은 화학 기계다. 화학 반응이 일어나려면 에너지가 필요하다. 생명을 유지하는 데 있어 에너지 운용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유전 그리고 최초의 생명체에서 사람에게 이르는 진화의 역사까지 물리학자에게 중요한 것은 에너지다. 에너지의 흐름을 보면 세포의 생화학과 생명 진화의 실마리가 풀린다.

우리는 21세기, 과학의 시대에 살고 있다. 자기가 어떻게 생각하든 누구나 과학의 영향을 잠시도 벗어날 틈이 없다. 새로운 시대에서 과학은 교양이고 문화여야 한다. 과학자들이 시민과 더 자주 만나고 시민들이 과학을 더 자주 접해야 하는 이유다. 그 시작점은 교양 과학서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인간’를 첫 번째 과학책으로 권하지는 않는다. 터무니없이 어려운 책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 생각 없이 편하게 책장을 넘길 수 있는 책도 아니다. 이미 과학과 익숙한 독자들에게 새로운 지평을 열어 줄 책이다. 현대 물리학, 화학, 생물학, 뇌과학, 정보과학이 도달한 지점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현대 과학 지식의 지도책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세상 곳곳을 다니지는 않더라고 지도책 한 권은 있어야 하는 것처럼 내가 당장 모든 것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이런 책 한권은 있어야 마음이 편하다.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나의 심장을 떨리게 했다면 김상욱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인간’은 내 뇌를 울렸다.

이정모 전 국립과천과학관장 keaj@kea.k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